어제 오전 강의를 마치고 대전의 이응노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이응노 선생님의 신소장품을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공부하다 보면 반만나야 하는 거장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분이 이응노 화백이시죠. 제겐
특히나 외국의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들만의 전통에 응집되어 있는 요소들을
해체하면서 그것을 패션에 적용하는 걸 자주 봤습니다. 그만큼 서체는
단순하게 '글자'라고 두 음절의 단어로 규정할 게 아니죠.
최근에 신간 <댄디, 오늘을 살다>를 내놓고 이제 2쇄를 찍었습니다.
이날 박인경 명예관장님도 함께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신 터라, 얼굴도 뵙고
책도 드렸습니다. 이응노 선생님의 작업에 반한 건, 꽤 오래전입니다. 대전시립미술관에
강의를 다녔는데, 그때마다 빼지않고 이응노 미술관에 들러 작품들을 봤습니다.
군상과 문자추상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테마를 통해, 드러내는 시대의
아픔이랄까요. 전통을 해체한다는 말을 참 자주 듣게 되는데
이걸 가장 먼저, 제대로 접근한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신소장품전에는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
옥중에서 그린 그림들을 다수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동백림 사건에 대해 잘 모릅니다. 유신시대, 중앙정보부, 오늘날의 국정원이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었죠. 194명의 유학생과 교민의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적화활동을 했다는 게 자칭 중앙정보부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순
거짓말로 밝혀졌고, 대법원 최종심에선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습니다.
전쟁세대, 간첩이란 단어만 들먹여도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당시 최고 권력자가 이러한 프레임을 씌우는 짓은 결국 자신의 불안한
정권을 유지하고 보위하기 위한 협잡질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관람객들이 신소장품전을 보러 오셨더라구요.
도슨트분께서 설명을 차분하게 해주셔서 따라다니며 글과 말과
그림 속 생각들을 정리하며 읽어보았습니다.
우리의 서체가, 그 전통의 틀을 깨고 껍질 속에 내재된
일종의 혼을 끄집어낼 때, 강력한 예술의 영감이 된다는 걸 보여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합니다. 전통을 존중하자 합니다.
전통은 멈춰있음이 아니라, 재발굴을 통한 창조의 원천이라고
참 거창하게 말합니다. 그런데요. 정작 그 전통의 틀을 현대적으로 바꾸고
틀을 깨려고 하면 기존의 상식과 틀에 갖힌 이들은 하나씩 저항하고 그것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형태상의 고수'라는 것으로 환원되기 쉽습니다.
한복도 마찬가지죠. 맨날 이런 저런 말은 오가지만
정작 기본적인 틀을 깨자는 쪽과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는 쪽과
이도 저도 아니게 절충과 혼합만 시켜놓은 쪽도 많습니다.
응접실에 이응노 선생님의 작품이 새겨진 가구와 쇼파가 있는데요
너무 멋져서 한컷 찍어왔습니다.
중국의 갑골문자를 비롯해, 인간이 만든 무늬, 바로 인문의 정신의
정수에는 글자가 결합, 분리, 병치되면 만들어내는 수많은 생각의 실타래가
숨쉬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실타래를 담고 있는 그릇을 형태상으로 고정화시키면 언제든
생각은 그 속에서 사장되고 햇살을 보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글자를 주목하고, 사람들이 만들고 생성하는 집단의 서체들을 보는 과정은
중요합니다. 이미 글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군상의 삶이
밀접된 정신의 상형문자이기에 그렇습니다.
박인경 명예관장님과 즐거운 담소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박인경 선생님과 둘도 없는 지인이셔서
저도 그 덕에 선생님을 뵈었네요. 제가 연세를 듣고 놀랐습니다. 놀라울 만큼의
단아함과 유모어, 거기에 우아한 패션감각까지, 저로서는 두손가락을 올릴 수 밖에 없었어요.
선생님, 항상 건강하게 작업하시고 활동하셔서 많은 후학들에게 작은 빛이 되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시대의 벽을 넘고 관통하는 예술의 힘이 오늘도 우리를
감싸고 돕니다. 그 힘에 취한 멋진 하루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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