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설국열차 리뷰-시스템의 본질은 폭력이다

패션 큐레이터 2013. 9. 8. 16:23

 


설국열차를 봤어, 무서웠어

 

영화 <설국열차>를 어제 봤다. 끝물에 본 셈이다.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을 좋아한다. 그가 서울단편영화제에 백색인이란 작품을 내놓던 시절, 그의 작품을 유심히 봤었다. 영화사에서 인턴을 할 때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 박기용 감독님의 <모텔 선인장>의 조감독이었던 그에게, 조명관련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다. 이후 그의 영화는 놓치지 않았다. <괴물><마더>로 이어지는 작품에서, 항상 작품 내부에 스릴러의 코드를 정교하게 삽입하는 그의 탁월한 능력을 발견하곤 박수를 쳤다. 어느새 그는 작가주의 감독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영화에서 무섭게 다가온 장면이 몇 개 있다. 교실 속 총탄세례 장면. 바로 설국열차 윗칸에 있는 아이들의 교실이었다. 교실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영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장이다. 그 기술은 바로 배제와 폭력이었다. 아이들이 아래칸 아이들에 대해 기억하는 방식, 그것을 말로 표현할 때의 표정에서 아이들의 본질이 드러난다. 사회 속에서 가진 자들이, 박탈당한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 영화는 이런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교육은 저 아래칸에 있는 이들을 자신의 삶을 위해 이용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윌포드의 미덕을 가르치던 여자 교사가, 갑자기 기관총으로 무장한 반란진압군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모습. 어찌보면 그 모습을 다소 느린 화면으로 잡아준것은 그 모습에 담긴 아이러니를 느린 호흡으로 느껴보라는 감독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너희가 시스템을 아느냐

 

대사 중, 열차의 엔진을 만든 윌포드를 만나 나누는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 바로 비율(ratio)이다. 18년간 움직인 기차, 그 속에서 한정된 자원을 놓고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늘어나는 인구를 조정해서 특정 비율로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어의 비, 혹은 비율을 뜻하는 Ratio, 이것은 두 개의 숫자를 비교하기 위한 것으로 배수로 표현된다. 가령 a:b 가 3: 1이라면 a는 b의 3배다. 이 비율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게 비교대상이다.


이 대사 장면을 볼 때, 섬뜩하게 내 머리를 스치고 간 것은 바로 이 ratio란 동일 철자를 가진 라틴어였다. 라틴어로 Ratio는 바로 체계, 시스템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그 내부의 것들의 비율을 강제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조율해가는 운명을 안고 있다는 뜻일까? 섬뜩해졌다. 

 


윗대가리들의 세계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들

 

우리에게 적절한 비율을 영속적으로 제공해줄 시스템은 없는 걸까? 열차 속 세계가 우리 인류문명의 발전단계라고 설명을 붙이는 이들이 많던데 말이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비율이 존재하기 위해(시스템이 존재하기 위해) 우리가 비교해야 할 비교대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궁금해졌다.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선 개별 요소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윌포드는 말한다. 18년이란 기간동안 폭주하는 기관차의 내부는, 적어도 윗칸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평온하다.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반란도 결국은 인구를 줄이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여기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반란을 포함한 새로운 희망을 찾는 이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하고 그들만의 시나리오에 편입시킬 수 있을 때나 하는 말이다. 



시스템을 부수는 지혜는 어디에 


다섯 살 이하의 아이들을 병든 부품을 대체해 사용하고, 완전히 부품과 일치된 존재로 써먹기 위해, 아래칸 사람이 끊임없이 아이들을 낳아주어야 한다. 윗칸과 아래칸은 철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결국 아랫칸에서 윗칸으로 올라오는 저 변혁의 역사도, 시스템이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교묘한 플롯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스템이란 교묘한 '요물'이 써대는 플롯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문학을 좋아하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도 결국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니 이 원리가 통할거 같다. 행위와 플롯이 지닌 시간의 지속성을 깨는 것이다. 우리의 반복되는 행동이 습관이 되고, 언어가 삶을 지배하고 조율하는 기제가 될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억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각 시대마다 시대의 모순을 읽고자 했던 작품들이 기성의 작품들과 다른 언어의 배열, 혹은 문법을 사용했던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설국열차의 탈선은 어떤 일면에서 보면 시스템의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춰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전제조건이란 생각이 든다. 봉준호, 그는 정말 요물이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가슴 한구석을 관통하는 눈입자 하나, 머리 속을 떠돈다. 눈 덮힌 세계의 풍경이 이렇게 내게 다가왔다. 눈의 입자로 몸에 퍼렇게 멍울진 문신을 새기는 느낌이랄까. 정녕 스노우 피어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