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로보캅 2014 리뷰-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어디인가

패션 큐레이터 2014. 2. 8. 06:33


 


파시즘의 시대가 도래한다


어제 영화 로보캅2014의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1988년 폴 베호벤 감독의 <로보캅>이 세상에 나온 후로 동일하게 반복된 3탄까지 이 영화를 빼놓지 않고 봐왔습니다. 사실 영화 자체만의 스토리는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로봇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의 두뇌와 감정을 가진 전직경찰이 로봇수트를 입고 경찰직을 수행하는 것. 이게 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만 말하기엔 영화는 은근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최근 미국은 전쟁터에서의 군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무인원격조정 비행체인 드론(Drone)을 대거 포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의도는 좋습니다. 자국 군인들을 예기치않은 전쟁의 피해로 부터 막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이것이 야기하게 될 윤리적 문제에 있습니다. 영화 로보캅 2014를 연출한 조세 파디야는 미국의 이러한 정치적 판단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연출했다고 애둘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로시마 원폭을 예로 들어볼까요? 결국 이 모든 과정의 시작에는 해리 트루먼의 사무실이 있고 그는 폭탄을 투하하라는 전화를 걸었습니다. 원폭의 시작은 한 인간입니다. 그는 자유의지를 가졌고 자신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의사결정을 해야 했을겁니다. 그런데 의사결정의 주체를 자율적 로봇으로 대체하면 책임감의 소재를 물을수가 없게 되요. 아마존의 열대우림에서 마약상들을 소탕한다고 치자고요. 거기에 로봇을 풀게 되면 그들은 마약상들을 향해 총을 쏘겠죠. 아이들을 죽이겠죠.(이 지역의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마약상을 하게 되는 경우를 예로 든듯)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요? 엄청난 철학적 문제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점을 다루는 거에요" 


영화 로보캅 2014는 1988년 로보캅의 리메이크입니다. 물론 배경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원래 로보캅의 배경은 디트로이트였죠. 한때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주름잡던 도시, 그러나 미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함께 붕괴된 곳입니다. 재개발의 바람이 불고 그 과정에서 도시의 악을 말소한다는 미명하에, 힘없는 도시민들을 내쫒는 권력의 주체는 미국이 아닌 일본인이었습니다. 영화 2탄을 보신 분들을 잘 아실겁니다. 일본을 공공의 적으로 그려놨죠. 당시 소니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이 미국 내 부동산을 미친듯 사들이던 시대였고, 여기에 대한 반감이 분명 섞여있었을거라 생각됩니다. 



기술은 인간을 초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어쪄라고


2014년판 로보캅은 다시 공공의 적을 설정합니다. 바로 아랍입니다. 영화 초반부, 옴니코포레이션 기업이 만든 수많은 전쟁로봇들이 아랍인들을 보호한다며 학살합니다. 참 뻔뻔합니다. 그러면서 영화자막에는 앗쌀람 알라이쿰 : 당신의 평화를 빕니다란 표현을 끊임없이 갖다붙이죠. 최근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는 건 일본이 아니라 아랍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문제겠죠. 영화에선 미국내 로봇 경찰 배치를 반대하는 드레퓌스 법안이 상정되고 여기에 반대하는 옴니코포레이션의 대표인 레이몬드역(마이클 키튼)은 법안 통과를 위해 감정을 가진 인간을 로봇 안에 넣어서 여론을 움직이려 합니다. 


참 재밌습니다. 회사대표가 바로 자신의 막대한 부와 기술을 이용해 초인이 되는 베트맨역을 했던 마이클 키튼이란 점이 말이에요. 하긴 요즘 나오는 영화 속 초인들은 실제 자본과 기술이 만들어내는 거 같아요. 하긴 이게 현실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그렇겠지요. 로보캅이란 영화는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함의들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기술이 인간을 이전의 인간과 다른 확장된 초인으로 만들수 있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기술을 가지고 동일한 인간이 또 다른 타자인 인간을 위해 어떻게 그 기술을 사용하느냐의 문제로 고민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경찰, 국가기관의 산하에서 관리되는 공공재가 민영화가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여기에 로봇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에서, 다시 한번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을 놓고 피터지게 캐물어야 할 존재론적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인간을 대체할 로봇으로 인해 소외되는 인간노동의 문제와 기계파괴의 메세지도 담겨 있습니다. 1988년에는 미디어 장악과 도시재계발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 명령의 복종과 그 복종관계를 파기해야 할 상황의 윤리를 심도싶게 다뤘고 이건 이번 2014년판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한국사회를 달구고 있는 민영화의 문제는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영화처럼 로봇이 인간의 안녕을 지킨다고 하자고요. 그런데 결국 로봇의 총체적 관리를 맡고 있는 쪽이 로봇을 비윤리적 사건이나 자신의 사욕을 위해 사용하거나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만큼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로봇은 사회전체를 위한 공공재


이번 영화에는 미디어를 조정하는 뉴스쇼의 사회자가 등장합니다. 사뮤엘 잭슨이 연기하는 천연덕스러운 그의 모습에서 언론이 파시즘을 조장하고 바라보는 관점도 보게 됩니다. 드레퓌스 법안을 둘러싸고 아예 대놓고 기업편을 드는 매체와 언론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영화 속 세계는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우리 안의 도덕관념을 허물고, 가진자의 이익을 대변하며 공공의 선을 파괴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소수 정치가들과 자본가들의 손에 쥐어질 때, 기술이 가져다줄 낙관의 이면에는 바로 암울한 인간사회의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비판을 던질 때 꼭 욕을 먹는 집단이 과학자 집단이나 기술자 집단입니다. 그런데 되짚어보면 이런 기술을 정치적 책략과 자신의 권력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기술자들을 옥죄게 한건 항상 윗대가리들이죠. 영화 속에서도 로보캅에서 몸을 만들어준 과학자 게리 올드만을 제어하는 건 옴니코퍼레이션의 대표잖아요. 



기술자의 첫 구현은 가치 중립적으로 인간의 효용만을 위해 만들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자본으로 회수하는 과정에서 언제든 기술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속품이나 장난감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죠. 하긴 로봇만 그렇게 당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로봇처럼 살아가고, 부품사회의 일환으로 살아간지 오래이기에, 고도 전자통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도 중요한 실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죠. 


영화 상영 후, 로봇공학자인 한재권 박사님께서 자신의 로봇을 시연시키셨어요. 이후 방청객들과 함께 로봇사회의 긍정성과 윤리 등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시네토크를 하셨습니다. 토론의 장을 만들어주셔서 저도 한몫 거들었는데요. 어차피 우리 안에 이미 들어차있는 미래입니다. 로봇사회는. 로봇과 드론과 함께 인간이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분명 그 사용 이후의 평가와 윤리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답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도 있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