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책 읽기의 황홀

비오는 혜화동-마르탱 파주의 '비'를 읽는 시간

패션 큐레이터 2013. 7. 31. 12:30


강의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고 혜화동으로 갔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커피점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십니다. 한 권의 책을 

꺼냅니다. 때마침 비가 새차게 사선으로 창의 표면을 두드리는 군요. 마르탱

파주의 <비>란 책을 읽었습니다. 비에 대한 단상을 모은 책입니다. 어린시절 비가 

오면 참 좋아했더랬습니다. 하얀색 레인부츠를 신고, 빨간색 레인코트를 입은 꼬마아이는 

일부러 물 웅덩이가 생긴 도시의 패인 홈을 톰방톰방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아이는 <우중산책>이란 

한 편의 영화에, 멋진 말로 장면화라 번역되는 미장센이란 단어의 

매력을 배웠습니다. 비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시간은 고요합니다. 적어도 거대한 물방울이 마치 팝콘처럼

하늘을 자궁삼아 톡톡에서 탁탁, 혹은 컹컹한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쏟아집니다. 

그 소리에 주변의 음영을 담은 소음들이 잠시 조용히 차렷자세를 하고 있군요. 멋진 문장들

로 가득한 책을 한 줄 한 줄 읽고 있으니, 빗소리에 엉켜있는 감정의 층들이 선연하게 보입니다. 몇자

인용해볼까요. "비가 내리면 우리는 발아한다. 비옥함은 정신의 한 자질이다. 새싹, 떡잎, 생각

들이 자라난다. 우리는 그 과일들을 수확한다" 인간은 도시란 매마른 공간 위에서 예의

촉촉함을 잊지 않으려 수액을 가진 다른 인간들을 만나는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듯 내린다.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며 느닷없이"

느닷없이 다가오는 소나기엔 세상의 모든 슬픈 사랑을 경험한 연인들의 짠 눈물

의 입자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너만 슬픈 사랑을 하는 건 아니라고 위안하면서 우리의 

눈물에 섞여 예의 짠맛을 지우고 말죠. 비는 그 자체로 힐링이 됩니다. 그렇게 여전히 부글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잠시 휴지의 시간을 부여하는 것. 아니 휴식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이

찾는 패스워드. 마르탱 파주는 비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거칠던 비가 가늘어집니다.



좋은 책을 발견하는 날, 문장의 공백 속에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상상을

합니다. 줄을 긋는 것은 영혼의 땅에 펜스를 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는 시간의 물질화다" 흘러가는 추상적 시간의 흐름을 날카롭고, 때로는 

온화하고, 뚝뚝 부러지며, 각종 소리와 굵기를 자랑하는 비는, 무심한 듯 앉아있는 도시 공간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을 그나마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선물입니다. 이 책 참 좋네요. 

산문을 읽는 즐거움이여. 내 인생의 강의도 이렇게 찬연한 은유와 따스한 

통찰이 넘쳐나는 시간이 되면 좋으련만. 넘어야 할 길항이 깁니다.



4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