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피터 린드버그 사진전 리뷰-송혜교의 얼굴을 찍다

패션 큐레이터 2013. 4. 28. 00:31


청담동 꼬르소꼬모 3층 갤러리에 다녀왔다. 패션사진작가 

피터 린드버그의 사진전 마지막 전날, 겨우 시간을 내어 갈 수 있었다.

폴란드 태생의 포토그라퍼, 피터 린드버그는 다양한 패션잡지의 화보에서 그의 

미적 시각과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다소 넘은 느낌은 있지만 

여전히 그가 포착한 미의 이미지들은 견고하다. 밀도깊은 견고함이라기 보다는

당대의 사진적 관행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여백을 만들어낸 사진언어다.



15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각종 직업들을 전전했던 그는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카메라를 손에 잡게 된다. 그는 모델을 찍을 때, 옷보다 옷을 입은 

여성의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별것 아닌 듯한 논평같지만, 이건 패션 사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기점을 만든다. 패션사진은 상업사진이다. 철저하게 옷의 이미지

를 소비하고 판매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사진이다. 1920년대를 거쳐 50년대 60년대까지

이런 경향은 무너질 줄 몰랐다. 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점차 옷 중심의 패션 사진

은 예술사진과 자화상 사진의 논리를 받아들이며 그 경계를 허물어갔다. 

중심에 80년대 패션사진을 이끈 피터 린드버그가 서 있는 것이다.



학교 중퇴 후, 그는 독일 뒤스버그의 칼 슈타트 운트 호르텐 백화점에서 

패션 디스플레이 일을 했다. 이때 그는 마네킨에 옷을 입히며 옷의 질감과 마네킨

의 표정, 무엇보다 패션의 중요성에 조금씩 눈을 떳다. 18살 되던 해, 스위스로 이주했고 

이후 베를린 예술학교 야간과정을 다니며, 예술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나갔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자취를 따라 그의 생가가 있는 아를르까지, 무전 도보여행을 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면서 개념 미술이 도입되던 초기, 이 영역에 

눈을 떴다. 이후 사진으로 전과하면서, 개념미술에서 배운 정신의 언어를

시각 이미지에 적용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패션사진계에 

입문, 패션 포토그라퍼 한스 룩스의 보조로 들어가게 된다.



1970년대 등장한 개념미술의 흔적은 피터 린드버그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지금의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 이전만 해도

그는 마네킨을 이용해 개념을 표현하는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소 당시의 

패션사진 관행과 동떨어진, 고의적인 일탈을 일삼는 그의 작업은 이해되기 어려웠다.

패션 잡지가 강요하는 여성상을 찍기 싫다는 게 그의 이유였고, 여전히 이는 

당대 세력의 렌즈에, 일종의 반항적 제스처로 밖에는 해석될 수 밖에.



그가 전성기를 누린 80년대는 60년대 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이 본격적인

사회 내부의 모순을 고발하며, 실제 현장과 결합되던 시기다. 그래서일까, 한때

그의 컨셉을 이해하지 못했던 패션잡지들은 그가 포착한 변화하는 미인의 얼굴을 하나씩 

담아기 시작했다. 슈퍼모델이란 존재의 등장은 이러한 궤적을 그와 함께 그으며 새로운 패션 문화의 

요소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항상 익숙한 얼굴에 숨은 감추어진 익숙하지 않은 면모를 찾아

사진으로 표현했다. 그가 찍은 2006년 배우 송혜교의 이미지도 최근 종영된 드라마에서

단렌즈로 예쁜 CF 주인공같은 이미지로만 포착한 배우의 이미지와 판연하게 

다른 느낌이, 사진 전면에 오롯하게 스며든다. 강한 아름다움이다. 



이번 사진전에는 없었지만, 그가 찍은 80년대 최고의 슈퍼모델들의 모습을

보라. 당대 모델들의 건강한 모습이 녹아있다. 크리스티 털링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검은 고양이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타 등, 80년대의 패션을 좌우하던 그녀들의 모습이 좋다.

그는 항상 정직하게 이미지를 담았다. 과잉된 메이크업이나, 인위적인 조명과 스타일링을 

피해 달아났다. 패션사진의 네오 리얼리즘, 신 사실주의 경향을 다시 복원했던 

작가는 인위적으로 조율된 여성성을 버리고, 스스로 서고 도전하는 여자

들의 이미지를 담아, 여과없이 견고하게 화면 속에 드러낸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규범이란게 존재한다. 사실 나처럼 복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패션사진은 단순히 한 벌의 옷을 담은 다큐멘트가 아니다. 여기엔 변화

의 도정 속에서 새로운 시대와의 불화와 조화를 꿈꾸며 한발자욱씩 나아가는 여성과 남성

그들을 보호하는 정신의 덮개로서의 패션이 있다. 패션사진은 그런 의미에서 철저

하게 과장된 기표로 부터, 거룩한 기의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멋지다. 



그가 포착해낸 아제딘 알라이아의 디자인, 옷과 모델의 얼굴 중

얼굴이 더욱 강조되는 건 어쩔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터키출신의 개념 디자이너의 옷이 퇴색하는 건 아니잖는가.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절제된 이미지가, 극단으로 흐르면서 대드팬 미학으로 변모되고 있는 건, 아쉬움이 남지만

그는 옷을 입은 주체와, 옷의 존재론을 떼어냄으로써, 패션사진의 성립을 가능케 한

멋진 아티스트다. 그의 사진 앞에서 한동안을 하릴 없이 서성거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