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으로 가는 길-추억에 관한 소묘
목요일 오전, 군산대학교에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패션협회 모임에서 우연히 뵙게 된 정연희 교수님의 부탁으로 오랜만에 군산이란 도시를 내려가게 된것이죠. 제게 군산은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군산의 이성당 제과점과 오랜시간 줄을 서야 하는 짬뽕집이 나오는 그곳. 제겐 대학 4학년 시절, 영화사에서 인턴하던 시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현장을 보러가기 위해 내려갔던 곳이기도 합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느낌이 도시 전체의 배면으로 흐르는 도시였지요. 11시 반에 도착해서 점심을 위해 찾아간 퓨전일식집입니다. 새만금 방조제가 보이는 곳에 식당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있나 보네요.오랜만에 청신한 바다의 빛깔을 마음에 담고 왔습니다. 바다를 보니 마음 한 구석이 펑뚫리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는 이유-청춘은 비루하지 않다
음식맛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서빙보시는 분이 아주 친절하게 하나씩 챙겨주셔서 행복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올해 바다를 한번도 가보지 못한 제가, 군산에 특강을 위해 갔다가 드디어 바다를 눈에 담고 올 수 있었네요. 하늘과 물이 맞닿는 접면 위로, 수평선이 그려집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의 정거장으로 자리하지요. 빗물과 눈물, 인간의 분비물까지, 인간의 바다는 가장 낮은 자세에서 포용하기에, 허리굽혀 자신에게 오는 물을 흡입합니다. 요즘 대학교수님들이 강의를 종종 부탁합니다. 복식사와 미학을 넘어살아온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해달라는 요청도 많습니다. 사연팔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본의 아니게 스펙 중심주의에 빠진 이 나라에서, 괜스레 기죽어 있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는 것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위로도 하기 싫습니다. 청춘이기에 아플 이유도 없지만 이걸 빌미로 징징대는 것도 싫거든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지치지 않고 자신의 꿈을 감내하며 그려갈 수 있는 사회의 구조를 만드는 데 어른들이 동참하는 것일 겁니다. 패션에 대해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한 벌의 옷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삶을 확장하는 일임을, 그 속에 오롯하게 담긴 철학을 배워 나가기엔 4년은 참 짧은 시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저의 이야기지요. 개인사 늘어놓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공감을 위해 우선 저의 마음부터 여는 것입니다. 스펙에 대한 생각들, 요즘 화두가 된 멘토에 대한 생각을 나눕니다. 패션사를 통해 시대의 정서구조를 이야기를 하는 제 강의는 어느덧 요즘 만나는 대학생들에 대한 저의 생각히 하나씩 덧입혀집니다. 교수님들이 아이들을 보는 관점, 그들에게 듣는 이야기도 경청합니다. 지방의 아이들의 장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의외로 강건해서 인내심이 뛰어나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기에 저 아이들의 꿈, 그것을 펼쳐가는 과정을 더 면밀하게 지켜보고 싶습니다. 종이 위로 끓여내는 해물탕 국물이 시원하더군요. 요즘 탕을 이렇게 종이판 위에서 요리해서 내놓는다더군요. 시각적으로도 좋고요. 하긴 종이로 집도 짓고 한지로 옷도 만드니, 조리도구를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문득 드는 생각은, 한 장의 종이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펼칠수 있는 형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아이들도 그런 가소성 찰흙같은 존재들이죠. 문제는 과도한 부모의 길잡이, 가이드입니다. 교수가 인턴자리를 잡아주거나 혹은 취업을 알선해줘도 부모가 전화해서 일일이 물어보는 건 좀 아닌 듯 합니다. 제가 다른 학교 교수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아이들을 자기 손아귀에서 놓질 못하는 것일까요? 왜 그러는지요. 그러니 아이들의 삶은 창발적 삶이 되기엔, 너무 묶여있는게 아닐까요? 항상 대학을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 시스템의 관점에서 볼 때, 아이들을 양육하는 태도도 고쳐야 할 필요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오는 것, 해산한다라고 할 때, 영어로 Deliver (배달)한다는 동사를 쓸까요? 그만큼 아이들은 우리의 몸을 통해 태어나지만, 결국 그 영혼이 하늘에서 전해지는 존재라는 서구적 믿음. 그 배후에는 아이들이 선물이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Kinder) 뛰어노는 정원(Garden)을 유치원이라고 했을까요? 자율적 주체가 되어야 할 아이들을 이 땅의 부모님들이 너무 과하게 묶어두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이들의 비루한건, 그들에게 주어지는, 혹은 비춰지는 부모들의 지나친 열망이 일면 있는 건 아닐까 생각 해봅니다. 비루함 대신, 비옥한 삶을 위하여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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