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 한해 3권의 번역서를 낸 샘입니다.
작년 말과 올해 초, <패션디자이너로 살아남기>를 냈고 이후 <불멸의 보석>
과 <패션디자인을 위한 색채기획>을 번역했죠. 내년에는 단행본 저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여하려 합니다. 한국이란 나라는 참 이중적일 때가 많습니다. 이중성은 전체적인 삶 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드러나지요. 번역작업을 저술보다 낮게 치부하다보니
정작 저술을 한다는 자들은, 힘들게 번역된 책들을 편집해서 자칭 자신의 색깔을 넣어서
썻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구매가 망설여지는 책들을 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힘들어도 한걸음씩 가려 했습니다. 블로그에 왠만한
정보들, 제가 만난 사람들, 그들을 통해 배운 것들, 단상을 정리해 올린 결과는
하지만 더러움 그 자체에 머물때가 많았습니다. 자칭 출판사의 에디터란 자들은 블로그를
몰래 훔쳐보며, 자신들이 번역해야 할 책들을 고르거나, 자신들이 내는 책 제목 정하는데 도움이나
받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블로그로 대중성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패션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의
습관을 들이는데 이 블로그는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자칭 패션을 테마로 출판하는
어줍잖은 출판사들의 페이스리프팅(브랜드 이름바꾸기)과 복사및 붙여쓰기만 늘었습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 이후 단행본을 낸지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영문으로 한국
패션에 대해 썼고, 이 또한 문광부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지만, 제대로 된 값은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은 툭하면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재능기부'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이 이제는 불쾌합니다. 재능기부 좋지요. 하지만 그들 각자가 재능을 키우고 육성하는데 들어간
비용에 대해선 눈을 딱 감고, '정부에서 하는 일이니 헌신하라' 류의 말을 듣는건 기분이 딱히 좋지
않습니다. 12월 초순 영문책자가 나오면 여기에 대해 꼼꼼히 하나씩 자문자답하겠습니다.
소득면에서 가장 경제적 약자층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이용하는 작태,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칭 시민단체라는 분들, 요즘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무슨 '콘서트'류의 기획들, 예술인들의 재능기부를 강요하지 마십시요.
번역 후기를 쓰려다 보니 울컥해서, 본의 아니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못했네요.
저자 스테파노 파피와 알렉산드라 로즈는 크리스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경매사의 보석 전문가
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당대를 주름잡던 셀러브리티, 상류사회 인사들, 배우들이 사후에 경매에 내놓은
보석류의 역사를 역으로 추적해갑니다. 개인의 다양한 역사가 아로새겨진 보석들의 이야기를
읽는 건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결혼식 선물로, 약혼 선물로, 혹은 화난 애인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쟁쟁한 보석 하우스들을 통해 구입한 당시 최고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보석들을 보는 것, 그것 만으로도 이 책은 꽤나 즐겁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동양인에게는
결코 낮설지 않으면서도 낯선 요소들, 외국 왕가의 족보와 계보를 읽어내는 일은
정말이지 어려웠습니다. 어느 왕조 대공의 몇대 손의 사돈의 팔촌까지 언급해가며 보석의
소유자들에 대한 소개를 해놓은 탓에, 독자들을 생각하고 가독성을 고려해서 어떤 부분을 살리고
어떤 부분을 가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상류사회 인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에선
당시의 패션과 복식문화, 사회사를 일정 부분 알아야 정리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서지학 전문가임을 잊고 글을 쓴 것인지, 고유 명사 하나하나를 찾아서 설명을 곁들이는것도
쉽질 않았습니다. 보석 전문가인 저자는 상세하게 각 보석에 대해 보통 8줄, 10줄을
넘어가는 묘사는 놀랍고 멋졌지만, 이를 한글로 옮겨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원래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다 보니, 도판도 디지털로 다 보정해야 했고요.
그래서 원본보다 오히려 더 나은 이미지와 색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고생은
다른 곳도 다 하지만, 적어도 보석책을 번역하면서 우리가 주얼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틀을 조금씩 바꿔보길 기대했고, 보석의 기호학이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을 소제목으로 뽑아서 보석이
여성의 삶과 어떤 정서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해 내고 싶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되니
않았나 싶은데요. 마지막 판단은 독자 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표지 디자인도 너무
애를 먹였습니다. 디자이너란 분이 계속 몽니를 부리며 6개월을 지난하게
끌었던 모양인데, 이 과정에서 출판사 에디터와 대표님도 맘 고생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무엇하나 쉽게 넘어가는게 없네요.
이제 보석책 하나 마무리 하고, <패션 디자이너를 위한 색채기획>도 마무리에
들어갑니다. 이후 <구두 디자인 Footwear Design>도 내년 초까지 정리하려 합니다.
번역은 지난하고 버거운 언어와의 싸움입니다. 제가 번역을 고집했던건, 적어도 이 힘겨운
과정들이 비전공자인 제게 엄청난 양의 '학습'을 요구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내년 중반까지
<가죽 제품 디자인 Leather Design>을 번역해내야 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한국의 가죽장인들을 만나고
공방을 다니고, 과정을 다시 익히고, 용어를 재정리하는 과정들이 힘겹지만 제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것이
쌓이다 보면 자칭 내공이란게 되겠죠. 내공이란 것도 결국은 전문가들이 봐서 확실해야 하는 것일거고요.
저는 논문 쓰는 것 보다, 단행본을 쓰고 실무자와 만나서 현안을 해결하고 풀어가는 걸 즐깁니다.
그렇게 CEO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고요. 번역을 한다는 건 타인의 글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누군가에게 속닥거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지경을
얻고 싶은데, 여전히 넘어가야 할 산이 많네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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