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필로소피아

인생이란 캔버스를 그려가는 법-날마다 새롭기 위하여

패션 큐레이터 2012. 11. 3. 23:58

 

 

 

 

삶은 캔버스다


패션과 디자인 분야의 철학적 단상을 담는 폴더에 본의 아니게 작은 소회를 담아봅니다. 요즘 학생들의 작품들을 발품 팔아가며 찾아봅니다. 아이들에게 '개인의 가능성과 용기, 혹은 힐링'만을 떠들어서는 안되겠다고 느끼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기성세대가 된 제게도 책임이 있음을 배웁니다. 시스템의 문제와 국가적 지원의 문제, 누군가를 선정하고 기회를 주는 문제가 반드시 선의로만 해결되지 않을 수 있음도 배웁니다.

 

참신한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머리 속에 쾅 하고 박힐 때면, 오히려 온 몸이 소롯하게 살아나는 느낌을 얻습니다. 창의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익숙한 것들을 다시 환기 시키는 힘, 낯설게보도록 이끄는 힘 말입니다. 복식의 역사와 미학을 독학하면서 배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옷을 통해 보여주는 혹은 옷을 통해 인간이 투영해 왔던 감정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옷을 통해 스타일의 언어를 개발하면서 스스로 함양시키고 개발시켜온 정체성의 문제도 포함이 되죠.

 

오늘 에스모드에 다녀왔습니다. 2학년 학생들의 작품이 참신성이 뛰어나서 놀라고 왔습니다. 당장 사입해서 매장에 걸고 싶은 옷들도 보였지요. 패션은 마냥 참신함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이 입어야 하는 사물이기에, 인간의 의지와 감성을 잘 살려내야죠. 또한 입고 나갈 수 있어야 하고요. 갤러리의 한 복판에 걸린 빈 캔버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 한국 현대화의 거장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화가의 삶은 매일 매일 내 앞에 놓여진 캔버스를 부숴버리는 싸움의 삶'이란 말씀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대면해야 할, 혹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대상 혹은 숙제들이 있습니다. 화가에게는 캔버스가, 조각가에게는 조형을 위한 물적 질료와 내용이, 패션 디자이너에게는 개념의 옷을 입히는 기술과 재료들이 있습니다. 한번에 그려지지 않기에, 한땀에 옷이 만들어지지 않기에 반복하고 누적되는 삶의 경험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익숙함이 주는 타성을 깨고, 참신함을 지키기란 참 쉽지 않지요. 글쓰기도 그럴 것입니다. 지난 12년 동안 블로그를 지켜오면서, 성실함 만큼은 제 자신의 시그너처라고 생각을 해왔었는데요. 성실함 만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비전의 태두가 되진 못할 거 같습니다. 노력이란 것도 추상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닌, 일상 속에서 내 자신을 매일 깨부수는 연습의 일환이자 정신적 에포트여야 하는 것이죠.

 

작가들을 만나는 걸 좋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그들을 통해 사실은 내 자신의 모습을 보죠. 참신과 구태, 노력과 게으름, 이상과 현실, 세 가지 층위의 세계에서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 그래서 오늘 같이 아이들의 다양한 생각을 보고 온 날은 힘이 나면서, 제 자신을 채찍질 하게 됩니다. 라틴어 공부 게을리 하면 안될 거 같습니다. 패션과 정신분석학을 연결해 강의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거든요. 오늘부터 다시 라캉 책을 잡고 온 몸을 흔들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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