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K-Fashion 책을 쓰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섬세한 감정을 영어로 표현하는 게, 나름 영작을 꽤 잘한다고 자부하던 저였지만
쉽지 않았거든요. 이 책의 마지막 4부가 서울의 패션 스트리트 소개였습니다. 압구정과 신사동
가로수길을 넘어, 제 펜끝이 향한 곳은 바로 부암동입니다. 코끝이 시원해지는 공기가
느껴지는 곳, 많은 디자이너들이 밀집해있진 않지만 테일러링에 강한 이들이
모여 한땀한땀 수제 드레스를 만드는 곳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부암동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더니 은근히 핸드 메이드의
거리라고 해도 될 만큼 숫자는 적지만 알찬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금속공예 장인이
운영하는 아뜰리에와 바이올린 제작 장인도 있었고요. 단아하고 적요한 골목길 사이사이로
보이는 작은 무대의상 하시는 분의 가게며, 임선옥 선생님의 파츠파츠 매장이며, 또한 오늘 소개하는
박소현씨의 아뜰리에며, 옹기종기 작고 예쁜 것들이 감춰져 있는 패션거리였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곳은 바로 부암동에 자리잡은 패션 디자이너 박소현의
아틀리에 <포스트 디셈버 Post December>입니다. 제가 디자이너 박소현씨를
알게 된 건 패션협회에서 주최한 <신인 디자이너 육성 프로그램>의 한 강의를 맡으면서
였습니다. 그때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패션의 스토리텔링을 가르쳤는데요. 단순하게 스토리의 개념을
가르치기 보다, 복식사와 미적 테마를 함께 끌어내서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들을 가르쳤어요. 5시간이 넘는
긴 시간 중 2 시간은 각자 디자이너 프레젠테이션을 시켰는데, 자신의 룩북으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을
남긴 디자이너가 바로 박소현씨였습니다. 무엇보다 영국에서 패션을 공부하던 시절, 프로젝트
제목이었다는 포스트 디셈버, 한국어로 번역하면 13월이란 뜻이 되는데요. 저는 사실
이 제목을 들었을 때, 예전 읽었던 독일의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의 <13월>을
생각했답니다. 그러고보니 의미도 많이 닮아있었더라구요.
서울패션위크를 앞두고 디자이너 임선옥 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정확하게
5미터만 걸으면 찾을 수 있는 그녀의 아뜰리에에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핸드
메이드 드레스와 테일러드 재킷, 코트 등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을 전개합니다. SFAA의 신인 디자이너
로 출발해서 컬렉션을 진행하다가 지금의 포스트 디셈버 브랜드를 만들고 사업을 시작한 건 2009년 입니다. 짧다면
짧은 연한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디자이너 소현씨를 참 좋아하게 된 건, 예술성과 수제의 정신을 잊지
않으려는 듬직한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강의에서 만났을 때도, 그녀의 룩북과 리서치 노트를 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펜싱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낸 작품을 만들면서 찾아낸 그림이 제가
블로그에 설명했던 것과 닮아서 깜짝 놀라곤 했죠. 뭔가 통할 것 같더라구요.
"아직까지 저는 많은 부분 예술적인 부분에 좀 더 치중해왔다" 라는
디자이너의 말처럼 그녀는 2011년 부터 자신만의 특기인 비스포크 수트를 시작합니다.
비스포크(Bespoke)란 영국 세빌로에서 시작된 맞춤형 수트입니다. 짧게는 4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고객의 치수를 재고 수기로 기록해서 원장에 남겨 보관하지요. 비스포크란 영어로 나를
대변하는 것이란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만큼 한 사람만을 위한 옷이 되는 셈이죠. 고객에 따라 철저하게 일인을 위한
재단과 맞춤정장을 만듭니다. 제가 소현씨 재킷을 보고 마음에 들었거든요. 저는 어깨선을 자연스럽게
잘 살린 재단을 좋아합니다. 남성복에서 흔히 포워드 피칭이란 재단기법으로 통해요.
그만큼 옷을 입은 이들을 단아하게 조형해내는 멋진 기술이죠. 손맛이에요.
2시에 임선옥 선생님 메종에 갔다가 선생님과 함께 찾은 소현씨의
아틀리에, 최근에 리뉴얼을 해서 좀더 넓어진 느낌입니다. 2012년 가을/겨울 옷도
좀 자세히봤고요. 커피가 고팠던 저와 임선옥 선생님을 위해 그녀는 향이 좋은 커피와 두 개의
달콤한 감을 내놓았습니다. 가게와 가까운 곳에 있는 그녀의 집 마당에서 키우는 감나무가 무르익었다네요.
2년마다 열매를 내는데, 천개 가까이 열린데요. 토요일날 바구니들고 감따러 가야 할 듯 합니다.
재킷 색감이 참 좋더라구요. 환한 것이 말이에요.
사실 이 날도 소현씨 만나러 가긴 했지만 슬쩍 들렀던 것이라서
머리아프게 지금껏 해온 작업의 성격을 묻거나 이런 식의 인터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옷이 좀 보고 싶었어요. 제가 보기엔 소현씨는 상의, 탑 종류를 참
잘합니다. 그건 기초가 탄탄하다는 뜻이고 재단실력이 좋다는 뜻이기도 해요. 사진 속 매화무늬를
레이저컷으로 찍어 만든 부분도 끌립니다. 그녀는 한국의 전통무늬들을 자주 사용하는데요.
중요한 것은 전체적 착장에서의 비율의 문제이고 균형의 문제겠지요. 이런 걸
잘 해내야 촌스럽지 않게 우리의 것을 녹여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핸드 메이드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구상노동과
손 노동을 함께 하며 최종적으로 빚어질 산물의 실루엣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의 위험, 혹은 답답함, 손으로 하는 모든 작업들이 그렇지요. 그러나 이 과정들을
견뎌내며 만드는 산물에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가 배어나기 마련입니다. 기계적 정교함이 채울 수 없는
그러나 숫자로 측량할 수 없는 이러한 비계측성으로 인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죠. 그래서 아쉽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런 손의 정신을 다시 한번 재발견하고
우리의 삶에 채우려는 욕망이 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 또한 정상적인 진화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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