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패션위크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어떤 작품들이
등장할까 내심 기대가 큽니다. 홍대의 자이 갤러리와 전쟁기념관으로 나뉘어
전개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의 스케줄을 사전에 점검하고 시간을 짜내느라
쉽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 신인과 기성이란 잣대로 나눌 수 없이 넥스트 디자이너와 기존의
디자이너들의 쇼를 나누었더라구요. 모든 디자이너들의 옷을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이벤트로 가득한 10월, 시간을 내어 일일이 챙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타까운건 디자이너
박윤정 선생님의 쇼가 있는 25일날 대구 가톨릭대학교에서 명사특강이 겹쳐서 부득이
쇼를 보러가지 못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스튜디오로 직접 갔죠.
이번에 발표될 작품들의 밑그림, 테마와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아주 즐거웠습니다. 현재 SADI의 교수님으로도 활동중이시지만
사실 박윤정 선생님은 중견 디자이너로 오랜동안 뉴웨이브인 서울이라는 디자이너 단체를
이끌었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패션의 적지 않은 공헌을 해왔습니다.
선생님의 스튜디오를 찾아간 날은 구두 디자이너 이겸비씨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원래 이날 겸비씨랑 저녁약속을 하고 식사를 마친 후 압구정동
메종으로 간 것인데요. 겸비씨가 이번 박윤정 선생님 컬렉션의 구두를 맡게 되었다네요.
늦은 시간, 오늘 밤새워서 작업을 하셔야 한다며 찾아간 저희들에게 준비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는 박윤정 선생님의 작업을 참 좋아합니다. 란제리 디자인도 잘하셨고, 섹시한 느낌의 실루엣도
참 잘 뽑아내는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박윤정 선생님이 란제리 브랜드 피델리아를 책임지고
있던 시절, 매출은 항상 상위권을 달렸죠. 갖고 싶은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랍니다.
스페인의 명장,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내가 사는 피부>
를 보시고 많은 생각거리를 얻으셨다고 하네요.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저도
썼었습니다. 탐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메시지를 치밀하게 담아내는 스페인의 시네아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한국에도 꽤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죠. 이 영화에 보면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나옵니다. 조형의 도상과 색감에서 얻은 생각의 실타래를 이번 쇼에 보여주실 거라네요. 디자이너
의 생각을 듣는 시간, 가슴 한편 놀라움으로 가득찹니다. 정말 철저하게 논리를 준비하고 시각언어로
풀어가고 있구나란 생각이죠. 사실 교과서 같은 말 같지만 이렇게 못하는 디자이너들도 상당
합니다. 리서치의 힘을 믿는 것과, 철저하게 누적된 조사의 힘을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
게다가 옷은 작은 디테일 하나로 전체의 느낌이 확 달라지기에, 균형과 절제를
통해 하나하나 한 벌의 옷을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죠.
실루엣을 연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의 신체를 변형, 왜곡, 파괴, 생성
하며 디자인의 원칙들을 새롭게 써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디자이너는 인간의 육체를
상수로 두고 이 과정을 매번, 시즌마다 해내야 하죠. 그래서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자세한 영감보드와
실루엣 연구, 소재와 색상, 영감의 변형에 관한 것들은 이번 최종 작품전 사진들을 통해 하나하나
풀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자이너를 연구하고,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영감의 실타래를 논리적으로 풀어가다보면, 그 자체로 디자인을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사례가 됩니다. 학생들에겐 최고의 소스가 되지요.
최근 일산 아람누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빅토리안 앤 앨버스 박물관
소장전 <오웬존스와 알람브라>전에 다녀왔습니다. 오웬존스는 건축가겸 디자이너로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을 여행하며 이슬람 건축과 장식을 접하고 당시 만났던 문양들과
선의 의미를 디자인을 통해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모든 영역의
디자이너들에겐 좋은 교과서를 남겼습니다. 제목은 <장식의 문법>입니다. 그는
직선과 곡선, 나선을 어떻게 결합하고 반복하고, 해체하는지를 철저하게
연구하면서 추상장식요소와 평면패턴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패션은 항상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이 세 종류의 선을 풀어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번 박윤정 선생님의 작품에는 나선에 대한 심사숙고한
생각의 타래들이 풀어나올 것 같습니다. 옷의 각 요소에 자리잡은 디테일한 측면에서 이런
부분들이 묻어나오게 될 것입니다. 루이즈 부르주아가 남긴 글들과 평론도 읽어봐야
할 듯 합니다. 그 생각에 대한 적응적 사유를 표현한 것이 이번 옷이니까요.
디자이너들과의 대화는 즐겁습니다. 단 즐겁게 이끌어낼 수 있는 소재를
통해서 그 지점 위에서 함께 춤추며 웃는 것입니다. 지나친 주관성에 빠져서 디자이너를
함몰시키거나, 냉혹한 기존의 생각에 매몰되어, 옛것들의 기준을 통해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 모두 다 피해야 할 태도입니다. 디자이너의 스튜디오를 찾아간다는 것, 그와 생각을
나누는 것은 작품에 대한 원안자 자신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독창성이란 단어의
영어단어 오리지낼리티 Originality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작의 근원이 ~에게서 발원되다란
뜻입니다. 결국 의미를 만드는 주체가 디자이너냐 아니냐의 문제가 되는데요. 그런 점에서
디자이너가 만든 한 벌의 옷을, 디테일을 온 힘을 기울여 읽어내야 합니다.
서울 컬렉션에 나올 디자이너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스튜디오에서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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