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끝나는 명징한 노래가사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10월은 저 같은 문화키드들을 위한 성찬이
차려지는 달이기도 합니다. 요 며칠 새, 현대무용 작품을 두 개를 봤고, 오늘은
삼청동과 평창동, 인사동을 톰방톰방 뛰어다니며 20개가 넘는 전시회를 소화해야 했습니다.
22일부터는 전쟁기념관과 홍대 앞 자이 갤러리에서 서울패션위크가 열립니다. 패션은 항상 저 너머의
세계를 그리죠. 환절기를 넘어 만추와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패션은 봄을 꿈꿉니다.
올 2013년 S/S 컬렉션을 분석하느라, 다양한 룩북과 정보지
색채와 패브릭을 다루는 심포지엄도 빠지지 않고 꼼꼼히 다니고 있습니다.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는 1966년 설립된 이탈리아의 가죽 명품 브랜드입니다.
보테가란 이탈리아어로 공방입니다. 워크샵 혹은 장인의 아틀리에를 의미하죠.
베네타는 베네치아란 뜻이고요. 이미 1970년대 대형 브랜드들이
로고(logo)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던 당시부터
노 로고 정책과 철저하게 '절제된 디자인 전략'을 통해 지금껏 시장에서 싸워왔던
브랜드에요. 올해 초 최초로 지금까지의 보테가 베네타의 역사를 정리한 도록이 나왔습니다.
대나무 바구니를 엮은 기술로 만들어져 있는 걸 아실 수 있습니다. 이걸 이탈리아어로
인트레치아토라 하는데요. 보테가 베네타의 가죽제품들은 이 엮음기술을
시스너처로 자리잡도록 노력해왔지요. 전통적 장인의식 그대로
상품화하고 시장화한 대가로 얻게 된 명성인 셈이지요.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토마스 마이어는
독일 출신의 디자이너였습니다. 소니아 리키엘을 비롯한 다양한 브랜드
에서 경험을 쌓았던 그는 지금껏 보테가 베네타가 가죽공방을 넘어 다양한 패션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감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번 2013년 봄/여름 컬렉션은
지금껏 보테가 베네타가 보여준 절제된 우아함이 봄의 성글어가는 기운을 포착합니다.
1940년대의 실루엣을 이용해 선보인 그의 드레스는 복고풍이면서도 결코
반동적 복고가 아닌, 희망과 추억을 한줌 쥐려는 여인들의 아련한
정서를 고스란히 런웨이에서 보여주었습니다.
토마스 마이어 특유의 실루엣은 항상 한편의 그림처럼
정교한 프린트물로 시작합니다.
유기적으로 절단해낸 옷의 각 단면 단면에는 휘갈긴 듯한
펜화의 흔적이 남아, 끊어지지 않게 한 번에 그린 섬세한 펜화를 연상시키죠.
깨알같이 주얼리를 박아넣은 스커트, 매혹적인 코르셋 드레스
풍성한 버튼다운 블라우스, 펜슬 스커트, 이 모든 것들이 1940년대 복식에서
전쟁의 끝을 기다리며, 자신의 여성미를 꾹꾹 누르며 버티던 여인들의 모습과 중첩됩니다.
꽃이 군락으로 뭉게 뭉게 피어나는 프린트 물 위로
흑옥으로 꼼꼼하게 연결한 드레스를 한번 보세요. 고혹적이지요?
섹시한 느낌을 잃지 않도록 레이저 컷으로 정교하게 자른
드레스와 아플리케 자수가 어울려, 봄에 피어나는 여인의 농밀한 기운을
알알히 토해냅니다. 금속느낌의 뷔스티에와 밀도깊은 자수로 만든 스커트가 잘 어울리죠
연어의 살빛을 닮은 새먼 핑크와 베이지, 화이트를 주조색으로 하여
1940년대, 청년문화의 시작과 더불어 그들에게 힘을 싣어주었던 본격적인 기성복
세대의 실루엣이 다시 한번 우리 눈에 펼쳐집니다. 패션은 항상 계절과 함께, 그리고 앞서
진행됩니다. 다가올 시즌에 대한 기대감, 그것은 디자이너가 바로 곧 현현할 세계를
저만치의 세계에서 바라보며 설계하는 일종의 도면같은 것이죠.
보테가 베네타의 도록을 아마존에서 신청해놓고 기다리는 지금도
그런 마음입니다. 특히 가죽제품에 대해서 공부할 방법이 별로 없는 한국이죠
대부분 현장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맞지만, 여기엔 텍스트로 나와서 참조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죽을 선별하고 처리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각 브랜드는
물론이요 현장 기술자들이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정리해 놓은게 없는 실정이죠. 그래서 이번에 FIT의
교수가 쓴 Leather Design 책의 번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제 블로그를 통해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되길 바라고, 무엇보다 그 세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단행본을 쓰는게 저자로서는
더 좋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고요. 그러나 쓰는 것만으로는 정작 한국 패션시장에서, 패션계를 꿈꾸는
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힘들기에, 돈이 되지 않는 번역에 혼신을 쏟습니다.
물론 내년 상반기에는 멋진 패션의 인문학 책이 나올 겁니다. 여기에도 가죽의 정신에 대해 그리스
고전을 한줄 한줄 읽어가며 풀어놓은 부분도 있지요. 책을 쓰는 것과 다가올 계절을 기대하
는 것은 비슷합니다. 현재의 버거움을 넘어, 여전히 꿈꾸게 하는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하는 것, 제가 블로그를 쓰는 이유고, 저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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