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힘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현재를 넘어 다가올 시즌에 대한
명민한 감성과 희망을 품게 해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2013년 봄/여름
펜디의 컬렉션은 이런 소담한 희망들을 깔끔하게 풀어내는 힘을 보여줍니다. 추석을 보내고
앉은 이 자리, 밀린 원고와 단행본, 번역거리로 머리가 아프지만, 9월 22일 전 세계를 상대로 라이브로
보여준 펜디의 컬렉션은 한마디로 빅뱅입니다. 거대한 풍선이 터지면서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모델들, 캣워크를 걸어가는 그 현란한 시간의 앙금들이 조금씩 인위적 무대에 가라앉을 때
다시 한번 빅뱅을 터트립니다. 터질것 같은 화려한 프린트가 무한한 별 무리 무늬의
폭발과 함께 다가온 계절의 환희를 그대로 토해냅니다. 겨울의 아픔을 게워내듯
환한 기운이 맨 앞줄에서 모델의 워킹을 보던 이들을 일깨웁니다.
1925년 로마의 베니스 광장의 한 켠, 엄마 아델 펜디가 운영하던 모피와
가죽 워크샵 옆에는 작은 가게가 생겼습니다. 바로 펜디의 부티끄였죠. 이후 펜디는
모피란 보수적 소재를 혁명이란 단어와 만나게 한 힘이되었습니다. 이번 시즌도 틀리지 않았죠
1965년부터 현재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협업을 하면서 지금껏 모피란
소재를 어떻게 하면 현대화할 것인지를 고민한 그들입니다. 뽐내거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모던한 느낌의 모피작업을 하는 것. 철저한 수작업을 통해 표현해낸 점이 놀랍습니다. 특히
살다투라(Saldatura)라고 불리는 일종의 전기 용접 방식을 이용해 이음새 없는
완벽한 재단을 해냈네요. 이 방식을 통해 가죽과 천연 악어가죽을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모피의 혁신이겠죠.
이번 시즌 펜디의 작업은 보티첼리의 그림 속 봄을 맞는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인들의 의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2012년 가을/겨울을 지배한 모티브가 바로크라는
다소 육중하고 무겁고, 현란한 느낌이었다면, 다가오는 봄은 철저하게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불어주는 바람을 맞는 비너스처럼, 가볍고 통통튀는 느낌이 만연합니다.
이번 컬렉션을 펜디의 자매들과 함께 작업한 칼 라거펠트는
"시스틴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 속의 관점을 컬렉션에 적용했다"라고 주장합니다.
일단 시스틴 성당의 프레스코는 보티첼리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업도 존재하지요.
벽화 속 인물들의 의상을 보면 하나같이 하의들이 독특하고 그 길이가 상이한데요. 디자이너는 바로
이런 점에 주목하고 한벌의 옷을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떠받치는 느낌으로 만들었다
고 합니다. 실루엣들이 기술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영성적인 감성이 더욱 배어나는건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이외에도 다양한 소재를 통한 실험은 이번
패션쇼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크레이프
실크로 만든 칵테일 드레스며 거꾸로 뒤집어 입은 듯한 느낌이 나는
가죽 코트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펜디의 작업에서 우러나는 건
지적 유희를 절제하며 실루엣에 힘을 담아내는 일종의 추상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의상 모두 색채의 향연에 빠지되, 그 색의 힘을 검정색 프레임으로
가둬놓았습니다. 그는 시스틴 성당의 프레스코를 보며 궁륭의 형상들이 마치 빛이 마감될때
그림들의 외관과 외곽선을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굳이 미술사를 통해 이번 시즌을 접근한다면 그것은 러시아 구성주의란
장르와 만나게 됩니다. 러시아 혁명 후, 다가올 사회에 대한 밝은 미래를 표현하기
위해 시작된 장르였지요. 본질적인 조형 요소를 중요시 하고 쓸데없는 장식을 부정하는 방향을
이끈 이 운동은 금속과 유리 혹은 근대공업이 만들어낸 신 소재를 이용, 참신한 공간과 실루엣을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구성주의는 패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고전주의, 흔히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실루엣에서 배운 드레이프 중심의 패션이 만들어내는 우아함을
넘어, 극소의 소재와 기법, 장식을 이용해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인간과 그를 감싸는
옷도 이와 같은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죠. 여기에는 항상 기능성과 더불어 역학적인
힘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표현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담겼습니다.
이번 시즌 펜디는 자신들의 주요 상품군인 바게트 백에도 혁신을 가미합니다.
금속 부분들을 거의 다 떼어내고, 철저하게 비례와 균형이란 미의 요소로 돌아가는 것이죠.
특히 함께 선보인 하이힐을 보세요. 마치 레고블럭같이 조합과 재조합이란 정신을
표현합니다. 혁명 이후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의 정신처럼 말입니다.
금속 부분이 삭제되었지만 투명 플라스틱으로 표현한 에프자 로고가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아마도 계절의 변화 속에 통증을 앓는
이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조형하려는 기하학적인 꿈의 투명성을 담기
위한 것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기하학은 결국 공간의 특성을 연구하는 관점입니다. 깊이와 넓이, 부피, 각 공간과
인간이 관계맺는 좌표들의 값을 통해, 우리가 맺는 관계의 진정성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환경
의 주체가 되지만, 결국 그 환경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죠. 이러한 사유를
풀어가는 단순한 선들의 결합, 그 세계는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는 인간의 색,
그 화려한 힘을 검정의 선으로 봉쇄한 채, 절제를 요구하는 듯 합니다.
런웨이를 읽는 시간은 항상 즐겁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말하죠.
런웨이를 읽는 데, 왜 텍스트를 읽어야 하느냐고요. 결국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업 노트에는 아주 단순한 몇 개의 아이디어와 실루엣을 추출해낼 수 있는 시대 정신
한 두가지가 담길 뿐입니다. 하지만 그 혼효한 시간의 앙금들이 빚어내는 찬란한 영성들은 이렇게
비루하나마 글로 남겨주지 않으면 한 벌의 옷은 그저 시장에서 팔리는 한 벌의 옷으로
남고 말지요. 제가 한 벌의 옷을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이유입니다.
패션은 이렇게 바로크에서 미니멀리즘으로 또 새로운 방향선회를
하는군요. 언제든 쉽게 싫증내는 인간을 위한 패션의 배려
겠지요. 이번 펜디의 디자인도 바로 그럴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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