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밤늦게까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주말도 예전처럼 토요일 근무 후 철저하게 쉬던 마음의 습속을 버려야 할
때인지, 출판사 편집장을 만나거나 방송국 작가나 피디들을 만나 프로젝트 이야기를 할
계기가 많아지다보니 이래저래 작은 맛집이나 간단하게 대포 한잔 할 수 있는
식당을 찾게 됩니다. 우연하게 경복궁역의 갤러리에 강의를 나갔다가
지인과 함께 들러 점심을 먹게 된 식당인데 한마디 하려고요
원래는 피디랑 그 지역의 작은 커피집을 찾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주인장이 그날 아파서 문을 닫았더라구요. 생각지 않게 한참을 걸어오다 배가 고파
발견한 집이 이곳입니다. 원래는 막걸리를 전문으로 파는 집이니, 술안주를 중심으로 팔것이려니
했답니다. 점심에는 생각같지 않게 식사를 위해 오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항아리를 조형
한 조명기구를 받쳐놓은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 손때 묻은 가구들과 그 위에
주인장이 빈티지 샵에서 모았던지 유리 플라스크와 병들이 눈에 띄더군요.
계란 한 줄을 볏짚으로 엮어 놓은 꾸러미를 보니
정겹기도 하고요. 갑자기 계란을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납니다.
저는 유독 계란을 좋아합니다. 요즘 세대야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우스쾅스럽기
그지 없겠지만, 사실 제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도시락에 엄마가 계란 프라이와 소시지
반찬을 넣어주시면 행복한 시대였지요. 파래를 좋아했던 저는 항상 파래에 물이 들어
등 허리가 파랗게 물들어버린 계란 프라이를 쪼개고 쪼개어 밥과 먹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다보면 몰락한 양반으로서
그저 아내를 구타하고 투전판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는
김평산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아내는 오늘도 돈을 잃고 와서 행패를 부릴
평산에게 파국에 계란을 풀어넣고 솥에 넣어둔 밥그릇을 꺼내 밥상을 차리지요. 계란국으로
속을 푼 김평산의 기분 좋은 얼굴을 기억합니다. 물론 한대 줘패고 싶지만 말이에요.
그만큼 계란은 평범한 사람이 손이 닿을 수 있는 손쉬운 동물성 단백질이죠.
그래서인지 냉면가게를 가도 꼭 계란에 눈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계란은 요리하기에 따라 수천가지로 응용될 수 있지만 저는 집에서
종종 수란을 해먹습니다. 홀랜다이즈 소스를 듬뿍 뿌려 먹는 에그 베네딕트도
그 중 하나지요. 끓는 물에 계란을 깨 넣는 수란은 단순하면서도 단호하고 섬세한 타이밍 감각이
있어야 하기에 하루의 일진을 시험해 보는 용도로 종종 쓰곤 합니다. 별 말을 다합니다.
피디와 함께 들어간 식당에서 주문표를 보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봅니다.
어차피 술은 마시질 못하니, 술 좋아하는 프로듀서는 비위를 맞춘답시고 그저 속이나
풀자하고 두터운 계란 말이나 하나 시켜 밥을 먹자 합니다.
오이 넣은 황태탕이란 메뉴가 있어서 시켜보았습니다.
오이는 원래 생으로 먹을때는 시원한 느낌을 발산하지만 실제로
국 요리에 잘못 넣으면 약간의 비릿함을 낼 수 있죠. 오이의 파삭한 식감은
황태의 무르익은 국물맛과 어울려 더욱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시원함과 약간의 비릿함
그 두 세계를 온전하게 오가는 진자운동의 떨림같은 세계가 입안에 펼쳐지죠. 요리 블로거나 혹은
맛집을 찾아가는 블로거는 아니지만, 요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맛을 보면
어떻게 조리했을지 타진해보며 재료들을 꼼꼼히 살펴보곤 합니다. 일명 레시피맨.
이집 요리의 핵심은 제가 보기엔 신선한 손 두부와 일일이 손으로 키운
콩나물과 같은 식재료들에 있습니다. 무를 비롯한 버섯의
식감도 좋았고요. 물론 저의 취향입니다.
파래를 잔뜩 넣은 계란말이를 함께 시켜 밥을 먹습니다.
노릇하게 말려진 계란 말이를 보니, 짚 속에 놓여진 계란이 아른아른.
외국생활을 많이 했고 어디를 가도 절대로 스스로 한식을 찾아먹는 버릇이 없는
제게도 이북이 고향이신 아버지의 입맛이 유전으로 흐르는 지, 항상 명태를 조리한 것들을
군말없이 잘 먹습니다. 황태구이도 좋고 탕도 좋아하지요.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황태탕은 소설가
이순원 선생님의 <은비령>을 읽다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명인줄 알았는데 물어보니 강원도 인제군 귀둔리의
필례약수 근처에서 먹은 황태탕입니다. 깍아지른 듯 숨어있다고 해서 은비령이란 별칭이 붙었다는 동네분의 설명도
은비령의 설명이 있긴 했습니다만 사실 그날 추운 초봄의 미만한 쓸쓸함을 달래주었던 것은 그곳에서 먹었던
황태탕이었습니다. 별빛이 빗물처럼 쏟아진다던 그곳에 다시 가보지 못했지만 음식을 먹은 기억은
유독 혀끝에서 강렬하게 인이 베인 탓인지 도시 속 더 이상 별을 볼 수 없는 혼탁함
속에서도, 음식 한 그릇에 의지해 다시 한번 살아볼 기운을 얻어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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