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우리나라의 1세대 디자이너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지금껏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거나
혹은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던 과거 때문이다. 물론 1 세대라고 해서
다 추앙하거나 혹은 기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패션도
결국은 세대론적인 조화와 대화를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는 산업이 아닌가?
오트 쿠튀르의 경우 결국 선배의 손길과 지식을 배우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 변하지 않는 패션산업의 속성이다.
이번 2012 S/S 에서 선보인 패션 디자이너 안윤정의
작품은 Re: Value란 테마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말 그대로 재평가다.
전통이란 뜻의 Tradition 이란 단어를 라틴어로 찾아보면 Trader란 어근이다.
이것은 '전환기'란 뜻을 갖는다. 전통이란 굳건하게 변하지 않는 어떤 세상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그 내부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움직임과 동태성'을 내포한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지나간 것들을 되돌아보고 이를 통해 복식
디자인에 적용하는 문제는 매우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진정성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세대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추수한다. 과거는 현재와 달리
지나온 과정에서 검증된 시간이란 차원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흔히 복고풍, 레트로 패션을 좋아하는 심리는 여기에 있다.
이번 안윤정의 앙스모드에서 선보인 옷들은 하나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농익어가는
광물질의 단면에서 발견되는 다이나믹한 형태감과 대기의 가벼움, 물의
유동성과 영롱함을 고급스런 소재와 절제된
실루엣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광물질의 속성상, 그것이 빚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지표면 내부에서 투쟁을 하며 보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이 광물을
이용해 흔히 주얼리란 액세서리와 장신구를 만드는 이유도, 바로
변치않음과 오랜 시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번 뉴욕여행에서 자연사 박물관에 들렀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나무가 광물질로 변하는 과정을 보게되었다.
압력과 열, 숙성의 시간을 통해 빚어진 광물질 내부의 주황색 실선들의
무늬들이 고왔다. 그리움은 사무치면 돌이 된다더니, 자연의 일들
하나 그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시스루 룩은 바로 이런 그리움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패션을 비롯한 모든 디자인이란 행위에는
그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산물인 이미지와 제품, 공간, 신체
등과 관계를 맺는 인간이란 존재가 박혀있다. 그 관계가 파생하는 가치를
생각해보면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또 다른 렌즈를 갖게 되는 셈이다.
디자인이란 시선으로 인간의 삶과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를 다시 한번 배우는 것이다. 패션은
여기에 인간의 신체와 사회적 피부를 이용할 뿐이다. 패션문화, 나아가 패션 디자인의
문화적 담론이 필요한 까닭도 다름아닌, 과거와 현재의 삶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과거와 전통에서 캐낸 소재와 모티브를 끊임없이 변주하는 일도 사실은
현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읽고자 하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안윤정의 절제된 라인은 1920년대
본격적으로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화려한 러플과 장식을 떼어내고 철저하게 산업역군으로
변신하던 그 시대가 '고전'의 힘을 빌어 만들어낸 실루엣과 다르지 않다.
결국 모든 것은 돌고 돌 뿐,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가 발견한
약간의 변주가 가미될 뿐이다.
2012년 봄/여름패션을 소개하는 시간
유독 올 해 겨울이 추울거라는 소식이 들린다.
패션은 항상 다른 이들보다 한 시즌을 앞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것이 꼭 누군가의 삶보다
앞서 나간다는 식의 교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먼저 꿈꾸고, 나간 만큼
상처받기도 쉬울 것이고, 아프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되집어 보면
결국 견고한 광물질의 투명성처럼, 인간의 신체를 그렇게
아름답고도 빛나게 만들려는 투쟁의 일부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패션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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