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전히 서울패션위크의 현장에 와 있습니다.
일별 런웨이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이 보통 5-6명 많게는 8명까지
되다보니, 디자이너 한명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디자이너 전작을 다 살펴보려고 노력
하고 있습니다. 매년 컬렉션의 전반적인 평가가 있긴 했지만
디자이너를 그루핑하는 작업이 매우 진부했기에
이번에는 제대로 이 작업을 하고 싶었죠.
오늘 읽어볼 런웨이는 헥사 바이 구호의
디자이너 정구호의 2012 봄/여름 컬렉션입니다.
이번 구호 컬렉션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복식에서
영감을 따왔다고 하지요. 그의 옷에선 항상 브랜드 이름인 헥사
만큼이나, 건축적인 실루엣과 모던한 느낌이 공존합니다. 이번 컬렉션도
그 예외는 아닌데요. 정교하고 세련된 느낌의 테일러드 재킷과 날씬한 바지와
파삭파삭한 느낌이 배어나오는 셔츠, 마치 세차장의 직물 클리너를 연상
시키는 유쾌한 햄라인을 붙인 스커트등 앞서 열린 뉴욕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33벌의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마이크로 미니 기장의 보디수트 (원피스 수영복처럼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몸통을 감싸는 의상)을 한번 보세요.
올 화이트 팬츠 룩으로 시작되는 컬렉션은 터키 블루, 버건디, 블랙으로
압축되는 현란한 색의 변주를 선보입니다. 그는 깔끔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지만
옷에 여백을 주고 위트를 더하기 위해 대담한 프린지 장식을 실험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의 옷에서는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선이 절제와 균형 속에 실루엣의 최종적인 느낌을 완성합니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옷의 기능성을 고려하여 최소의 요소만을 나열하는 복식 제작상의
철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옷은 어떤 면에서 보면 외롭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른 브랜드와 매칭시켜 입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항상
외따로 떨어져서 주목을 받는 성향의 옷이기 때문이겠죠.
크람스코이 <마리아 페트로브나>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국립 박물관 소장
특히 이번 컬렉션은 로마노프 왕조의 제례복
그 중에서 결혼식 복장에서 볼 수 있는 색감과 형태를
차용해 변주한 작품들입니다. 특히 올 화이트 복식의 가슴 상판에
댄 장식은 유럽 전통의 가슴장식인 스토마커를 연상시키죠. 스토마커란
원래 16-8세기까지 여성들의 앞 가슴과 배를 빳빳한 직물과 패드를 넣어 만든 브이자
형태의 장식판을 의미하는데요. 여기서 견사에 보석자수를 두어 만드는데
이번 컬렉션에서는 이런 장식들을 최대한 배제한 채, 건축 기둥의
박공벽 장식처럼 만들어서 자리매김을 시켰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유독 남성복의 테일러링 원칙에서
빌린 직선적인 느낌이 강하게 배어납니다.
남성복의 선을 빌려 여성의 몸을 껴안다보니
다소 중성적인 느낌도 나는데요. 여기에 남성화에서 영향을
받은 대담한 느낌의 팜프스나 서류가방을 새롭게 해석한 백을 더하여
매니시한 여성의 룩을 만들어냈습니다.
정구호 스타일의 아름다움은 주의를 기울이고 시간을 들여 보지
않으면 그 매혹의 요소를 간과하기 쉬운 부류의 옷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1997년 부티크 구호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 젠(Zen/禪) 유행에 시동을 걸었고 옷 외에도 인테리어
문구, 식기, 공연 의상 등의 디자인, 설치미술 작업, 인사동 쌈짓길 프로젝트를 두루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그러나 정구호는 옷은 그가 타고난 패션 디자이너임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딸깍발이의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이번 컬렉션에서 눈에 들어왔던 건 앤틱한 느낌의
군용 훈장을 모티브로 한 드레스였습니다. 이 훈장이란 것도
결국은 중세적 전통의 계승이지요. 영주의 영광을 위해 그 가문의 위상을
드러내는 문장을 몸과 혹은 갑옷에 휘두른채 전쟁에 나가는 기사들, 그들의 공훈을
평가하여 봉토할 때, 수여한 것들이 지금껏 이어져 온 것입니다.
헥사 바이 구호 옷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엄청난
시간과 수고를 동반합니다. 이번에 사용된 `훈장(와펜)` 장식은 실제
와펜을 옷에 달거나 사진을 찍어 전사 처리하는 간단한 작업 대신 컴퓨터 일러스트로
일일이 48개 디자인을 새로 그렸다고 하지요. 그 다음 평균 4도면 가능한 원단
프린트 대신 187도짜리 고선명도로 작업해 그린 와펜에서 실제
훈장처럼 반짝거리는 효과가 나도록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구에서 군대용 훈장이란 것은
공훈과 영광의 상징입니다.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에게 주는
'지금껏 참 잘했어요'라는 자기 위안과 격려는 아닐까 생각도 해봤죠.
그럼 안되나요? 디자이너 정구호는 그럴 충분한 자격이 있는 디자이너입니다.
한국 패션계에서 그는 별의 위치에 섰고, 그만큼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지금껏 달려온
생을 반추하고 옷의 주름 마디마디에 곡진하게 배어나는 노역의 시간들, 그것에
대한 작은 훈장이라는 생각.....저만의 생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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