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서울 패션 위크에서 만난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보는 시간이다.
뉴욕 출장으로 인해 글의 공백이 생기긴 했지만 앞으로 한명씩
지속적으로 거론해 갈 생각이다. 트로아조 브랜드의 디자이너 한송의 옷은
아방가르드와 한국적 전통의 결이 만날 때 빚어낼 수 있는 섬세한
가능성에 대해 말해주는 작품들이다.
디자이너는 이번 컬렉션의 영감을
한국의 옛 거지룩에서 가져 왔다고 했다. 복식사적으로
실제 조선 시대든 혹은 근 현대든 이 땅의 거리를 배회하던, 거지들의 옷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담긴 책은 없다. 단지 그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뿐더러
그들은 사회라는 울타리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잊혀진 자들이란 점일거다. 정치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그들을 '호모 사케르'라고 불렀다. 복식사 연구가 왕족들의 복식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와중에 한국적 그런지 룩이라 부를 수 있는 컬렉션의 등장은 꽤나 유의미하다.
한지실과 섞어서 짠 다양한 소재들을 이용해 선 보인
한국적 거지 룩의 표상은 어떤 것일까? 천연연색으로 빛깔을 입힌
진회색과 베이지를 기본색으로 삼고, 여기에 파랑과 초록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거지룩의 실루엣과 표면을 채우는 전통적인 대나무 프린트가 인상적이다. 하긴 로코코 시대,
중국풍이 유행하던 당시 궁정의 여인들은 중국산 실크를 소재로 서양복식의
구성방법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최초의 문화적 하이브리드였다.
패션은 시대를 넘어, 과거와 당대가 결합할 수 있는
정신적 형상을 위한 실타래를 묶어낸다.
사실상 서구에서의 거지룩이라 불리는 그런지(Grunge)도
실제 거지가 입은 의상이라기 보다는 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얼터너티브 록의
하위장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말이다. 어느시대건 정통이라 불리는 하이패션의
자존심과 패션산업의 중추를 구성하는 엘리트주의, 그들이 만들고 유포하는 유행의 논리와 방식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있었다. 깔끔을 떨고 요란한 장식으로 구성된 그들의 옷과 정 반대의
대칭적 위치에 서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건 역시 더럽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었을터. 감성충만의 시대에, 오히려 무감각해지고 분노로 가득한
시애틀의 성난 젊은 세대들에게 그런지 음악은 그렇게 다가왔다.
80년대 중반은 사회와 기업 전반에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머리를 들고 등장한 때다. 그만큼 인간은 그 자체로 이해되지 못했다.
'조직인'의 탄생이었고 '조직과 연대'란 두개의 틀 속에서 인간의 개성은 의외로 잠식당했다.
사회란 참 재미있는 것이, 어떤 트랜드가 부상할 때 여기에 대칭적인 허구와 같은 또
다른 힘이 등장해 지배적인 양식을 조롱하거나 혹은 무화시킨다.
도시의 포도위를 걷는 유랑민들, 사회에 속해있으나
조직 속에 편입되지 못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가득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Pan)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했다. 사진에서
이러한 감성을 포착했던 것이 바로 데드팬(Deanpan)이다. 팬은 얼굴의 속어다. 어느 시대나
감성이란 불리는 무늬의 내면에는 인간의 표정이 있다. 그 표정은 한 마디 말로 규정
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다종다기한 힘들이 곱게 주름접혀 있는 세계이기
때문일거다. 이렇게 조직인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설정된
도시의 보헤미안들이 만든 패션이 바로 그런지다.
그런지 음악이 70년대 히피와 헤비메탈의 적자이듯
그런지 룩도 히피의 남루한 반전의 이미지와 하류층 복식의 영향을
자신의 디자인 속에 편입시켰다. 모든 것이 시스템과 조직이란 거대한 표제 아래
일사분란하게 변형되던 시절, 그들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이 편한대로 입고 싶은
옷들을 레이어드로 걸쳐입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믹스트 스타일인데
여러가지 스타일이 혼종되면서 새로운 시각문법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런지 음악이 대조되는 배음을 연결하는 기보법을 사용하듯
보색이 아닌 대비색을 혼합해 더 한층 대담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선보였다. 도시문화가 만든 하이브리다.
조선시대의 거지는 과연 어떤 옷을 입었을까?
사실 여기에 대한 판별이 이번 컬렉션의 인스퍼레이션을
명확하게 판단할 가치기준이 되긴 해야 할텐데. 사실 자료가 많지 않다.
많다고 해봐야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도에 보이는 거지들의 옷차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세부적인 사항들일 뿐이다. 목도리와 손토시를 동시에 묶어 목에 건다거나
하는 식의 패션들이 보이고, 혹은 잔칫집에 가서 얻은 비단조각을 옷에 기워서 상이한 재질감이 보이는
옷을 입기도 했으리라 추정된다. 이런 시각의 메스를 갖다대기엔 한송의 옷은 너무 세련된
느낌이다. 아이템마다 후드 처리를 했고, 진회색을 기본으로 써서 한국적인
전통의 그런지를 복원하려는 시도, 그 실험에 박수를 보낸다.
어느 시대건 역사는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집단적인 욕구와
그들의 꿈꾸고 때로는 좌절해야 했던 꿈의 의미들을 복원한다. 그런지도 80년대
중반, 우리들의 좌절된 꿈의 기록이듯, 패션은 다시 한번 유령처럼 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고도의 통제사회, 시스템과 조직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감옥처럼 우리를 둘러싼
사회, 그 속에서도 인간은 언제든 자신만의 존재감을 얻기 위해 영혼의
풍찬노숙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시대의 그런지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접근해야 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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