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런웨이를 읽는 시간

한국 패션계의 샤넬을 만나다-이신우의 2012 F/W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2. 4. 17. 20:00

 

 

런웨이, 디자이너의 혼이 구름이 되는 곳

 

올 2012 F/W 서울패션위크의 각 런웨이들을 종횡무진했다. 온 세상이 창의성(Creativity)란 단어에 집착한다. 정작 뾰족한 답은 내 놓지 못한채, 각개 전투에 빠져든 답안 중 하나가 바로 이 창의성이다. 문제는 언론에서 이 창의성이란 단어를 설명하거나 적절한 사례를 소개할 때, 창작자의 독특한 고유성과 스타일에 착목하기 보다 나이대를 나누어서 일방적으로 특정 나이 집단에 평가를 부여한다는 점일거다. 그렇다고 젊은 계층의 창작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의 관점과 접근방법, 무엇보다 한편의 시를 짓듯, 옷에 접근하는 그들의 태도가 세월에 따라 다른 결을 갖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주 절실하게 말이다

 

 

패션 위크 마지막 날, 신진그룹들의 작품 발표가 끝난 후 중견 그룹의 런웨이가 줄지어 이뤄졌다. 내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보았던 것은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 선생님의 재기전 런웨이다. 71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샤넬이 재기전을 가졌던 같은 나이에, 한국패션의 한 획을 그었던 디자이너는 묵묵히 런웨이를 설계했다.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소년의 나라'다. 일본 드라마 <언덕위의 구름>의 첫화에서 소년이 묵묵히 언덕을 향해 터벅 터벅 발걸음을 옮기던 그 장면의 영감을 옷으로 풀어낸 것이다. 공연 전 40분 전에 들어가 드레스 리허설과 백스테이지 출입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의 현대 패션사에서 디자이너 이신우는 반드시 복원되어야 할 이름이다. 이신우 선생님은 사진을 찍고나서 보면, 항상 예의 진중함이 묻어나오는 걸 발견한다. 세월의 결을, 디자이너로서의 삶의 결과 하나로 만들어,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을 견지하는, 이신우 선생님의 모습이 참 좋다.

 

1977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최초 참가, 1990년 도쿄 컬렉션 최초 초청 등 항상 디자이너의 이름 앞에는 한때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이 쉴새 없이 붙여졌다. 디자이너 브랜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사를 이끌었던 그다.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누군가의 실패는 후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젊은 세대의 디자이너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일종의 레전드였다. 한국적 전통을 현대화하거나, 혹은 현대미술 전공자 답게 다양한 미술의 영역을 패션을 통해 표현한 그녀의 과거 컬렉션을 살펴볼 때마다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선도적이고 앞을 내다보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패션계의 대모로 불렸던 그녀는 이후 모진 삶의 풍파메 자신을 내맡겨야 했다. 부도 이후 그녀의 이름을 단 브랜드들은 지하철에서 저가제품으로 변질되어 판매되기 일쑤였다. 디자이너의 정체성이 부인되고 단절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14년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남편의 병수발을 들며, 하염없이 손뜨개로 마음을 추스리던 디자이너는, 다시 젊은 세대들과 함께 런웨이에 섰다. 자신의 새 브랜드 CINU(시누)를 내걸고 컴백한 것.


 

인간의 상처는 아름다운 옷이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창의성이란 결국 시를 짓는 기술이었다. 온 생애를 통해 한 줄의 구를 남기는 시인처럼, 옷을 짓는 이들 또한 명멸하는 패션의 논리를 따라가되, 자신의 지문이 각인된 한편의 옷을 남긴다80년대와 90년대를 걸쳐, 이신우 선생님은 디자이너의 제국을 완성했지만, 절정의 순간에서 하루아침에 바스러져야 했다. 이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71살, 그녀는 다시 무대에 섰다. 그녀가 잡아야 할, 패션이란 구름이 무대 위에 떠있었다. 구름은 조명의 스펙트럼을 통해, 때로는 매지구름으로, 때로는 뭉게구름으로, 때로는 산운처럼 퍼졌다가 모였다. 세상의 모든 물은 하늘로 올라간다. 물의 입자는 영혼의 실이되어 구름을 직조한다 이번 컬렉션엔 유독 빗방울 패턴이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다시 하늘로 승화되어 비가 된다. 오늘 너무나 좋아했던 디자이너의 부활 속에, 기쁨이 한가득 응축된 탓이었을까? 런웨이를 보다가 참 한없이 울었다.

 

 

바로 옆에 계시던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도 울고 계시고, 나도 울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인지.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대중을 향해 말을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난 항상 언어의 빚을 지고 산다. 어찌보면 현란만 수사와 말의 능력을 조금은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속으로는 더욱 뼈아프게 운다. 말의 빚들을 갚을 수 없어서다. 미디어 앞에서, 방송 카메라 앞에서 참 말 잘하는 디자이너들이 많다.

 

대담하게 때론 자신의 영감을 언어로 더 잘풀어내는 이들도 많다. 여기에 비하면 71세의 디자이너는 여전히 언어 앞에서 주저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기다림의 시간, 외롭고 버거웠을 시간속에서 응축된 구름은 비가 되어 대하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그녀는 설명을 위한 현란한 언어대신, 살아온 날들을 피륙 위에 시침질로 한땀한땀 입혔다.

 

이건 누가 해줄 수 없는 일일 거다. 삶의 조각들을 기우며 아팠던 마음을 추스려온 시간의 입자가 오롯하게 담긴 기억의 그릇. 난 오늘 그 옷을 보고 왔다. 그녀의 빗방울이 내겐 눈물방울이 된다. 다시 한번 생의 무대위에서 꿈을 꾸는 한 인간을 축복하는 시간. 그 눈물조차도 달콤하다

  

 

나는 디자이너를 볼 때 실루엣, 배색구조, 형태감과 신체와의 조화 등 다양한 요소들을 살펴보지만 유독 점수를 높게 매기는 경우가 색과 색의 어울림에 있다. 이번 이신우 컬렉션에서 발견한 '또 다른' 따스한 색감 꽤 오래전, 케냐에서 마사이 부족과 종일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내려오던 길, 햇살이 부딪치는 땅의 빛깔에 찬탄한 적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념화된 색의 인식'으로 알고 있는 흙의 빛깔보다 밝고 곱기 때문이다. 갈색과 오렌지, 햇살과 촉지하는 땅의 빛깔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노을과 교접하는 땅의 색. 오랜 세월 기다리며 자연스레 익은 디자이너의 마음같다


 

패션 디자이너는 항상 시간과의 사투를 벌인다. 물론 다른 디자인 분과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시즌이란 개념을 일종의 숙명처럼 업계의 문법으로 받아들인 16세기 말 이후로, 패션산업은 두 계절의 격자를 뛰어넘어 소비자들을 끌어내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그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매년 매 시즌,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온 몸이 아플 수 밖에 없다.
 

 

이제 71살이 된 디자이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런웨이에 나선다. 유행과 산업, 인간의 정체성, 디자이너 자신의 상처가 버무려진 무대에서, 그녀는 다시 생의 연착륙을 위한 비행을 시작했다. 내가 기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누군가 쉬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나이, 툭하면 나이대란 걸 지정하고, 특정 나이대에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소유해야 하고, 그래야 누군가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지긋지긋하게 가르치는 이 나라. 우리가 만들어낸 생의 우상을 파괴하며, 무대 위에 당당히 서는 그녀의 모습이 내 미래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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