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마치고
거의 2년 여의 시간을 들여 한 권의 책을 마무리했다. 저술에 쏟아부었다면 두 권의 책을 너끈히 쓰고 남을 시간을 번역에 할여한 것은 책 내용들이 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5년 전 아마존에서 우연히 발견한 패션 컨설턴트 메리 갤할의 <Fashion Designer Survival Guide>는 운명처럼 나와 인연을 맺었다. 대형서점의 의상학 교재 코너를 갈 때마다 암담했다. 너무나도 바쁘고 훌륭하신(?) 교수님들 덕분에 이 땅에는 79년도에 초판으로 나온 복식사책이 여전히 교재로 사용되고, 이름조차 감감할 정도로 잊혀진 회사명이 나열된 패션 비즈니스 책도 오롯하게 서재 한쪽에 꽂혀있다.
자칭 패션 비즈니스란 명칭이 의상학부의 학습 트랙을 담당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제대로 된 책을 보기 어렵다. 그저 만만한 패션 마케팅 책들과 유통관리 정도가 전부랄까. 말이 이뻐 패션 머천다이징이니지 현업과 거리가 먼 구태의연한 내용으로 가득한 옛 책들이다. 그렇다고 패션 마케팅은 정교하게 가르치는 걸까? 모 대학 교수가 쓴 패션산업론은 프랑스 브랜드의 웹 사이트 내용을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유통구조나 가격정책, 무엇보다 상품기획과 같은 정교한 기술을 가르치기엔 내용들은 턱없이 빈곤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통해 미술사를 통한 복식사적 접근을 보여줬다. 향후 출간될 <패션 디자인 방법론>과 <패션사회심리학> 에 심혈을 기울이는 건 학생들이 읽을 교재가 없어서다. 물론 지금껏 나온 저술들과 판연하게 다른 내용들을 증보할 것이고, 일반 대중을 위한 강의 시리즈로 풀어 갈 생각이다. 이 땅의 패션 담론이 대중과 학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건 다른게 아니다. 저술이나 소통을 위한 노력도 없고, 그저 편하게 가자고 맘 먹는 학계의 나태함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새인가 이 땅에는 자칭 연예인들에게 옷을 입힌다는 스타일리스트란 작자들의 허접한 책들만 판을 친다. 다 자업자득이다.
무엇보다도 패션산업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나라에서, 4-7년 정도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참조할 책이 없다는 건 참 창피한 일이다. 조직 내에서 소통역을 해야 할 이들이 참조할 책이 없는 것이다. 나아가 기존 패션 회사에서 독립,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조언을 해줄' 책이 없었다. 사실 아마존에서 메리 갤할의 책이 5년째 패션 산업 분야에서 스테디 셀러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거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음에 들었던 건, 5년 정도 경력을 쌓아야(그것도 어깨너머로 열심히 배울 경우) 알 수 있는 노하우들이 천연덕 스럽게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책 번역하면서 자칭 '본전생각'이 든 건 이런 이유다.
메리 갤할은 패션 인큐베이터로서 지금껏 뉴욕 패션 시장을 통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육성해왔다. 필립 림 3.1, 쇼샤나, 두리 정 등, 이름만 대도 알만한 디자이너들이 그녀의 손길을 거쳤다. 이 책은 무엇보다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는 '패션산업의 현실'과 그 정글같은 세상을 견뎌낼 체험화된 지식이 담겨 있다. 번역을 하면서 뉴욕패션시장과 한국패션시장의 현실이 그리 다르지 않고, 실제 산업을 구성하는 얼개와 각 업체간 거래방식과 조건, 무엇보다 시장을 읽는 방식은 유사하다는 점을 배웠다. 말 그대로 서바이벌이다. 생존을 위한 가이드다. 당장 에디터들을 구워삶아야 하고, 연예인들의 협찬을 따내야 하는 디자이너들, 무엇보다 매일 매일 돈 걱정, 카피될까 두려워서 디자인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어디 이뿐인가? 가장 중요한 건 생산을 위한 공장을 잡는 것이고, 원단을 떼어오는 문제다. 이 책은 이런 문제점에 대해 자세하고 상세히 설명한다.
패션 마케팅 책들을 보면 기존의 마케팅 원론의 얼개를 가져다 짜맞춘 지식들이 난무한다. 거시적인 단어들이 오가지만, 실제 현업에선 딱히 와 닿지 않는 내용들이다. 왜 그럴까?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책을 쓴 자들은 자기가 운영을 하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입장이란 미명하에 제3자의 언어로 내용을 쓰기 때문이다. 당장 바이어랑 약속을 잡아야 하고 운전자금을 친구와 친지에게서 구해야 하는 이들에겐 솔직히 딴 나라의 언어다. 이 책의 장점은 밑줄을 긋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일상의 전략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패션이란 '돈을 벌어서 시즌을 버텨내야 하는 산업'임을 천명하는 책. 역자로서 실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각주를 풍성하게 붙였다. 물론 책을 줄이기 위해 과다하게 정리한 주석들을 가지쳐내는 바람에 아쉬움도 있다. 블로그를 통해 조금씩 정리해 볼 생각이다.
요즘같이 오디션 프로그램과 서바이벌이 사회의 화두가 된 시대, 패션 디자이너로 생존하기 위한 기술을 전수할 키트가 나온 건 다행이다. 힘들었지만 보람찬 번역과정이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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