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세상에, 이르게 온 디자이너, 이신우
패션 디자이너 박윤정 선생님의 메종에 다녀왔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작업하시는 이신우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날이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신우 선생님의 작업을 오랜동안 존경해 왔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 두 사람을 뽑으라면, 적어도 1세대에서 말이지요. 진태옥과 이신우, 이 두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사실상 한국의 현대패션사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분의 작업을 본 건 초등학생일 때입니다. 당시 월간 <멋>이란 잡지가 서점에 가면 걸려있었는데, 초등학생 눈에도 표지가 예사롭지 않았지요. 어찌보면 한국 최초의 패션매거진이었으니까요. |
한국 디자이너 1세대로 불리는 이신우는 오리지날 리, 영우, 쏘씨에, 이신우 옴므 등의 히트 브랜드를 선보이고, 파리 컬렉션 등 해외 무대에도 최초로 진출, 국내 외에서 입지를 다졌지만, 1998년 외환위기의 폭격을 맞았습니다. 회사부도와 잇따른 출혈이 이어지며 1 세대 패션 디자이너 중, 가장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작업을 보이던 디자이너가 무너졌지요. 이신우의 따님인 박윤정 선생님의 디자인도 만만치 않지요. 박윤정 선생님과의 만남은 아주 우연하게 이뤄졌습니다. 예전 문광부에서 뉴욕패션위크 준비를 할 때 자문단 성격으로 불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뵈었지요.
물론 <피델리아>의 성공적인 런칭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홈쇼핑을 통해 피델리아 브랜드를 새롭게 장식했으니까요. 이후 코스튬 디자이너로 <단적비연수>와 <태왕사신기>의 의상을 맡았습니다. 최근엔 영화 <마더>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김혜자 선생님이 칸 영화제 시상식에 나갈 때 입었던 의상도 박윤정 디자이너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이번 책에 <패션과 영화>코너에 박윤정 디자이너의 작업을 넣고 싶어 허락도 구하고, 선생님도 한번 다시 뵙기 위해서였지요. 이신우 선생님과의 첫 대면은 의외로 영화관에서 였습니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영화 첫날,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신지혜 아나운서와 제가 시네토크를 진행하는 날이었는데 디자이너 두분과 함께 이 자리에 오셔서, 어찌나 기뻤는지요. |
이신우 선생님의 작업을 소개할 이미지가 많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한창 활동하던 당시, 안 그라픽스에서 사진집이 나왔는데 제가 이 책이 없어서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이미지들을 부탁드리고 왔으니까요. 그만큼 이 땅에서 1 세대 디자이너 선생님들의 단점이라면, 자신의 작업을 아카이브화 하는데 능하지 못했던 게 사실 입니다. 후배들이 이런 작업을 해줬어야 했는데, 우리시대가 그런 걸 못해낸 게 사실이지요.
딱 한마디로 이신우 선생님에 대해 논평하자면 '너무 늦은 세상에 일찍 온 천재' 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지금에서야 유행하는 코드와 디테일을 과감하게 선보이고 적용했을만큼, 서양화를 전공한 디자이너는 회화적인 상상력을 자신의 작업에 과감하게 적용을 했지요. 한때 MBC 드라마 <주몽>이 인기를 끌면서 '삼족오'란 고구려 벽화의 이미지를 차용한 디자인들이 붐을 일으켰지요. 사실 90년대에 이미 한국 복식의 원형인 고구려 의상에서 아이디어를 캐내어 상품화 했던 건 이신우 선생님이었습니다. '아 고구려'란 테마로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과 함께 SFAA를 창립하고 파리 컬렉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던 때였으니까요. |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멋지십니다. 찾아 뵈었던 날도 의상 피팅 막 마치시고 어깨에 넣을 패드를 일일히 바느질 하고 계셨는데요. 내년이 되겠지요. 아시아 위크가 뉴욕에서 열릴 때, 제가 복식에 대한 특강을 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될 것 같아서 그때, 진태옥, 이신우, 이상봉, 이렇게 세 분의 서양복식의 한국화 작업을 영어로 강의 하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자료도 얻을 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습니다. 언제뵈어도 단아하세요. 친구를 보면 그의 삶이 보이듯,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김혜자 선생님의 느낌하고도 굉장히 중첩이 되는 면이 있죠. |
90년대를 통털어 한국 최고의 패션 브랜드였던 이신우, 새로운 부활을 꿈꾸며 또 묵묵히 작업에 들어갑니다. 2018년이 되면 50주년을 맞습니다. 저는 이신우 선생님의 50주년 기념 전시회를 꼭 한국에서 열어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사회는 디자이너에 대한 재평가, 역사적 맥락에 따른 재해석이 없는 사회입니다. 한 명의 디자이너를 미술관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지금껏 그/녀가 해왔던 작업들을 나열하고 헌사만을 바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박윤정 디자이너께서 '선생님(이신우)께서 유종의 미를 잘 거두실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시더군요.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 뚜벅뚜벅 예의 단아한 발걸음을 걷고 계신 디자이너의 뒷 모습은 어찌나 아름다운지요.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시가 필요합니다.
전시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가, 당대를 어떻게 읽어갔는지 그 시선의 오롯함을 넘어, 그 속에 포함된 그의 생각의 무늬들을 읽어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인간을 고고학적으로 접근하고, 사회를 한 벌의 옷이란 렌즈를 통해 읽어보는 일은 시대를 새롭게 읽어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전 세대가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았기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임을 배워야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디자이너의 겸손이지요. 자칭 젊은 디자이너들 중에 '참신'이란 미명하에 착각에 빠진 이들을 꽤 봅니다. 역사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면, 이런 행동을 잘 하는 법입니다. 인생에서 먼저 길을 간 이의 발자욱을 보고 그 궤적을 따라 걸어가는 후배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것.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발걸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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