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집쟁이 목사님에 대한 추억
목사님의 부음소식을 들었다. 오랜동안 폐암으로 투병하시며 수척해진 모습, 뵙지도 못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지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며 처음 만났다. 목사님 덕분에 이사 후 교회를 옮기면서 초대교회 생활을 시작했다. 나를 따라온 엄마를 포함 8명의 멤버가 '세상의 작은 모퉁이돌'이 되자며 모였다. 이름하여<한모퉁이 교회>, 초겨울의 신산한 기운이 번지는 반 지하 교회당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아빠를 따라 항상 대형교회만 출석했었다. 부티나는 명품교회에서 편하고 유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나는, 목사님의 만남을 통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영혼의 이주를 해야했다.
개척교회 생활로 많은 걸 배웠다. 작은 다락방에서 계란을 한바구니 쪄 함께 온 이들과 나눠먹기도 하고, 예배 후 돌아가며 국수당번을 하며 성도들에게 점심을 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국수는 왜 그렇게 맛있던지. 설겆이가 끝나면 시작되는 유년부 아이들 간식 먹이고, 성가대 연습시키고, 5시가 되면 찬양팀 준비를 한다. 1인 7역을 하며 살았다. 교회살림이 넉넉치 않아 그 당시 유행하던 '문학의 밤'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했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대형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을 찾아가 교보재를 빌리던 시절이다. 노회에선 교회 이름이 운동권 교회 같다며 소속도 안시켜주고 지원도 전무했다. 이 당시 괜히 쪼매난 교회 댕겨서 먼 고생인가 하는 '웃기지도 않는' 한탄을 했다.
최순남 목사님. 최고로 순한 남자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최씨 성에 옥니에 곱슬머리, 고집의 세기를 평가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추었다며 자평하던 목사님은, 실제로 기존의 목회자들과 다른 생의 궤적을 참 '고집스럽게' 그리며 사셨다. 대형교회의 부목사로 가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일 때, 그는 상계동 철거민촌을 택했다. 내게도 '이곳에 온 이유를 잘 깨달았으면 한다'고 조언하셨지만, 사실 철거민이란 단어가 뭔지 모르던 고등학생이었다. 생계를 꾸려가기도 어려운 판에, 돈 나올데 없는 가난한 동네에서 시작한 목회는, 목회자 자신의 육체적 노동을 한 없이 요구했다. 매일 못질하고 수선하는 목사님 모습을 보는 건 예사였다.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먹을 거리를 포함한 생필품을 목사님 댁에 선물처럼 배달하던 시절이다. 참 어렵게 살았지만 대못같던 훤칠한 목사님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
# 희망을 그리면 현실이 된다
문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목사님은 이 분야로 상당한 업적을 남기셨다. 대학진학 후 이후 한모퉁이교회와 멀어졌지만 엄마를 통해 교회소식은 항상 들었다. 목사님은 여행을 좋아했다. 세상을 돌아보며 조형자의 지문을 하나씩 찾는 일을 하셨다. 사진집을 봤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사진을 잘 찍는지도 몰랐다. 알고 지낸지만 오래지 아는게 별로 없는 것. 의외로 인간의 관계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더욱 죄송하다. 그는 큰 불이 되길 꿈꾸지 않았다. 거창한 교회를 희망하지도 않았다. 문화운동에 투신한 목사님 답게 백지에 '이런 교회를 지을것'이라며 드로잉으로 손수 교회의 모습을 그렸다. 지하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활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준비된 거처와 최소의 자본금을 모을 수 있는 희망가게를 차리는 것. 예배당 위엔 커피집을 내어 일반사람들이 편하게 책도 읽고 쉴 수 있도록 한 곳이었다. 가난한 교회살림에, 목사님이 스케치북에 그린 교회 모습은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을 오랜동안 그리면 사람의 생은 그 꿈을 닮아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놀랐다. 언덕위의 단아한 교회가 세워졌을 때, 어쩜 스케치북 속의 그림과 너무나 똑같은 것이. 작은 모퉁이 돌이 되고자 했던 목회자의 꿈을 그때서야 알았다. 우리는 비루한 모퉁이돌보단, 화려하고 멋지게 깍인 연석과 파사드를 좋아하지 않는가? 토대가 된다는 것은 의외로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난 늦게나마 목사님의 큰 뜻을 안 셈이다.....
# 하늘로 점프한 소년
목사님은 폐암을 앓으셨다. 오랜동안 투병생활을 하셨다. 그 와중에도 성도들과 함께 여행을 했고, 아프리카와 세계의 빈민촌을 누볐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당당하셨다. 성도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자신이 지금껏 찍은 사진과 아들의 글을 묶어 <하늘 점프>란 책을 장정해 주셨다. 읽으면서 또 놀랜다. 믿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라 말에 동의한다. 목사님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꿰어차고 계셨다.
생각해보면 목사님은 너무 일찍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신게 아닐까 싶다. 인간에게 주어진 힘은 결국 세월의 결에 따라 조금씩 나눠써야 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고집불통의 목사님은 이런 의사결정을 하기엔, 세상 속에 펼쳐진 신의 지문을 빨리 찾고 싶어했던 탐색자였다. 열정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목회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는 세상을 프레임에 다 담고 싶어했고, 그 속에서 자연을 보며 시를 지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이런 면면이 눈에 들어왔지만 한번도 감사의 말을 드리지 못했다. 항상 빚진 마음이다. 뭐라 달리 표현할 길도 없다. 하늘로 점프하고 싶었던 그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향기롭게 스러지기 위해서,
떠나는 자들은 고요히 떠난다. 그 고요는 웅변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남긴다.
생의 이편에 남아서, 떠나는 자들을 배웅하는 자들은 그들의 고요한 뒷모습에서 새벽안개
냄새를 맡는다. 그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새벽길을 떠날 것이다. 믿거니와, 우리는 어두움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 너무나 어두웠던 우리는, 사는 것으로 어두움에서
진 빚을 다 갚는 것이다. 삶 아닌 다른 지옥이 또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빛을 향해 간다. 우리는 빛의 아이들이다.
김정란의 <귀환, 멈칫거림, 몇잎의 꽃이파리> 중에서
참.....고맙고 감사했던 분이다. 이제 하늘에서 치열했던 삶의 열기를 벗고, 자유롭게 소요유하시길 소망한다. 목사님.....안녕히계세요. 그곳에서 뵈어요. 아니 그 곳에서 뵙도록 이 지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게요......개구진 시절의 모습만 기억하고 계실 목사님이지만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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