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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담서원지기 박성준 인터뷰-철학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봉우리가 된다

패션 큐레이터 2012. 2. 18. 18:30

 

 

 

길담서원, 재능기부 강연을 마치고

 

길담서원에 다녀왔습니다. 미술사학자 노성두 선생님의 뒤를 이어, 재능기부 강연에 참가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작품을 보며 패션의 인문학적 성찰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괜찮은 반응인듯 해서 기분도 좋고, 길담 내 다양한 공부모임이 있는데, 그 중 한 모임에서 복식사 공부를 할 거라고 하셔서, 오히려 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인문학 공부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말 한마디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인문학 인기는 핵심을 놓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안에 고전학습에 대한 주요한 맹점들,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한 성찰없는 인문학과의 만남을 만들었죠. 인문학이 결합되면 멋진 '혁신'이 이뤄지리라는 환상을 주조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한 패드(Fad)현상이 심화될수록 진정성을 가진 토론장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길담서원의 존재는 고맙습니다. 이런 공간을 통해서 건강한 담론이, 우리의 잔잔한 일상에 기반한 인문학적 성찰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길담서원은 통인동 지역에 있는 작은 인문학 공동체입니다. 물론 철학 원서를 강독하거나, 멋진 인문학자들의 강의를 들을수도 있으며, 책읽고 수다 떨고 편히 쉴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본따 만든 곳이죠. 유럽의 북카페 공간을 가보면, 한국과 다른 모습을 보실겁니다. 길담에서 강연하면서 뵈었던 모든 분들이 고마왔습니다. 다양한 일상의 공동체에 소속된 이들입니다. 금융업을 하시는 분, 학예사, 패션 마케팅을 하시는 분, 정신과 의사, 옷을 너무 많이 사서 고민한다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과 함께 참여하신 어머니도 계시고요.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의 시인 김수영론을 너무 듣고 싶은데, 스케줄과 충돌이 많아 걱정이네요. 어찌되었든 서원지기이신 박성준 교수님을 뵌것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수님과 만나 단아한 한정식 집에서 같이 식사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즘 철학공부에 푹 빠져 계시다고 하시더군요. 슬라보예 지첵과 스피노자 이야기도 듣고요. 그러나 더 멋진건 철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듣는 일입니다. 올해 72세의 나이, 살아온 삶의 나날을 단아하게 정리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연세지만 지금 그는 철학에 빠져있고, 더 깊이 공부하는 즐거움에 살아갑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남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분의 생은 적어도 크리스천인 제게는 교과서 같은 분이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며 징역을 살아야 했습니다. 1981년 출소하여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님이 소장으로 있던 한국신학 연구소의 학술부장으로 있으면서 80년대 진보적 기독 운동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죠. 개인적으로 저는 대학시절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온 책들을 탐독했습니다. 사회학적 성서읽기를 비롯하여, 성서의 사건을 폭넓은 시선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사건들을 오늘날의 현실에 비춰 반추하는 텍스트들이 저를 사로잡았죠. 물론 소망교회를 다니는 제겐, 그 책들은 꼭 목사님들의 추천도서는 아니었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읽곤 했죠. 그러는 가운데 논쟁도 참 많이 벌이고 했죠. 자크 엘룰이니 칼 라너, 김교신, 안병무의 책을 들고다니는 건, 압구정동 소망교회의 정서랑은 안맞긴 했죠.

 

박성준 선생님과 식사하며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피노자를 비롯해 지금 푹 빠져 있는 철학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며 제겐 풍성한 노장과의 대화였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이 철저한 겸손이 몸에 베어있다는 것일테죠. 우리는 툭하면 타인의 평가에서 '겸손'이란 렌즈를 들이대지만, 겉으로 꾸며진 겸손도 많죠. 정말 몸에 문신처럼 겸양이 배어있는 분을 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성준 선생님은 제가 패션과 인문학, 혹은 디자인 어디에도 학위가 없이 혼자서 독학을 해온 걸 아시는 분입니다. "철학도 우리에게 기억된 사람들은 정규학교나 학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항상 다른 사람의 철학을 해서는 고유한 철학의 봉우리가 되어 남지 못하는 법입니다. 저에게는 끝이 없어요. 그저 새로운 출발과 시작이 있습니다. 늦게나마 저 만의 고유한 철학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철학강의연습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의도이고요"

 

누군가 고유한 봉우리가 된다는 것, 우리는 누군가에게 희망의 좌표가 되고, 누군가가 오르고 싶은 산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갖습니다. 학위나 정규교육 뭐 이런 것들이 사실 '산'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검증하는 인덱스죠. 그런데 오늘날, 이런 인덱스가 그 지표기능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자신도 누군가의 철학을 베끼고 그의 언어로 사유해놓고선, 전문가인척 하는 이들이 많다는 거죠. 이런 사회에서 스스로의 길을 끊임없이 시작하는 분들. 길이 끝난 곳에서 또 다른 길을 시작하는......멋진 분들이 있어 힘이 나는 하루였습니다. 길담서원 자주 들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