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인스퍼레이션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 디렉터, 박웅현과의 만남

패션 큐레이터 2011. 6. 13. 07:00

 

 

만남의 인문학을 떠올리며

 

지난 금요일, 시간을 내어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주최하는 1박 2일 <창의성 확장 프로젝트>의 강사로 나섰습니다. 다큐멘터리, 교양, 드라마, 라디오, 편성 등 다양한 영역의 방송작가들을 만났습니다. 강의를 통해 패션의 인문학이 가진 매력을 소개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춘천의 라데나 콘도미니엄에서 1박을 겸해, 다양한 빛깔을 가진 작가들과 방송인을 만나는 일은 꽤나 흥미롭고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강의는 특히 제가 만나고 싶었던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기에, 저 또한 강의에 참여하려고 첫번째 강의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차비를 했습니다. 저는 광고 디렉터 박웅현이 쓰는 카피를 좋아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 이런 카피들이 떠오릅니다. 시리즈 광고물의 팬덤문화를 만들어냈던 <현대 생활백서> <사람을 향합니다>와 같은 따스한 인간미 넘치는 광고는 한국사회에서 광고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론까지 언급할 수 있는 깊이를 갖추고 있지요.

 

강의내용도 좋았고, 저 스스로도 창의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서로가 가진 방법론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국 창의성이란 건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조우의 방식일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함께 저녁을 먹은 후, 박웅현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며 산책을 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 산책길에 나서 나눈 이 짧은 시간이, 왜 이렇게 기억 속에 가득한지요.

 

박웅현 선생님의 따님이 미술과 패션에 관심이 많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도 자주 자극을 주고 받았으면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제가 배울게 더 많겠지요. 박웅현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기 마련이다. 만남은 지나온 시간의 격자에 비례하지 않는다"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단순하게 지식이 많은 사람, 툭하면 자신의 유학시절이나 추억담처럼 나열하며, 어디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니 어쩌느니, 학위를 어디에서 했느니 하는 구태의연한 학자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학자라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상당수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사람의 진을 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용기와 세상을 향해 '다양성'을 외치고 싶은 욕망마저 내려놓게 만듭니다.


 

신은 디테일 속에 산다......

 

광고는 현대 문화의 총화입니다. 매우 단순한 개념같지만, 소비와 문화라는 두 개의 축을 연결하는 매개체지요. 이 과정에서 당대의 기존관념에 도전해야 할 때도 있고, 그것들을 공고하게 조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소비를 하는 동안, 소비와 관련된 불안과 서스펜스를 잠시 보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흠뻑 빠지게 될 때, 환등기 속의 가상세계를 실제로 믿고 싶은 욕망에, 눈앞에 드러난 것들을 '잠시 진실'이라고 빋는 것과 같은 원리지요. 이때 한줄의 카피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는 "광고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회의실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업계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가장 창조적으로 진행하고 이끄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생각은 서로 부딛쳐야 하며, 서로의 부족한 간극을 매우고, 때로는 교량이 되어, 한 벌의 따스한 옷으로 태어납니다.

 

 

그는 말합니다. "신은 디테일 속에 산다'라고. 누구보다 이 말에 동의합니다. 창작과정에서 기실 타인의 것과 나를 가장 명징하게 가르는 부분은 다름 아닌 디테일이지요. 섬세하게 돌올하게 말려있는 이 생각의 실타래를 조밀한 골조로 하나씩 환원해 가는 방식. 이런 과정을 통해 한 편의 광고가 태어납니다.

 

박웅현 선생님과 함께 산책하며 걸었던 길입니다. 여름 초엽을 훌쩍 뛰어넘어, 꾸욱 짜면 초록빛이 봉싯하게 피어날 것은 여름 날의 산책길이었습니다. 그는 이 편한 세상 아파트의 <진심이 짓는다>란 카피로도 유명합니다. 저도 이 광고가 참 기억났던 게, 기존의 아파트 광고는 항상 캐슬이니 드림이니 하는 수사로 범벅이 되어 있던 때였지요. 아파트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신전에 올라가려고만 했지, 정작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우리'란 것을 잊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아이디어를 위한 회의를 계류낚시에 비유합니다. "두 시간동안 말이 흐릅니다. 그 속에 물고기가 있습니다"라고요. 벗진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산책하는 시간, 시간은 유독 느리게 흐릅니다. 말의 골재를 이루는 언어들은 선연하게 표면을 뚫고 나오고, 서로의 같은 빛깔과 코드, 사유의 방식을 가진 이들이 나누는 시간은 풍성한 열매로 변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의 강의에서 들었던 앙드레 모르와의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는 말이 연신 머리 속을 떠다닙니다. 저는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시>를 보면서 온몸을 떨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쓴 블로그 포스팅은 정말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글을 남겨 주셨죠.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문학이 유효한 이유란 제목으로 영화 <시>를 평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학이 유효하다 하지 않다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조건임을, 사물을 바라보는 이들의 프레임 속에서 견고해야 지켜내야 할 태도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의 책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보면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될까요? 란 선생의 질문에 한 아이가 답합니다. '얼음물이요'라고 또 다른 아이는 독특한 대답을 합니다. '봄이와요'라고요. 우리사회의 창의성을 위해 필요한 사고의 방식이 바로 후자의 사례인 확산적 사고입니다. 그렇다고 전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흔히 표준 지능검사에 의해 똑똑하다고 인전된 사람들이 주어진 자료나 문제에 대해 항상 올바르고 때로는 상투적인 대응법을 생각해 내는 것을 말하지요. 조직에서, 혹은 학습에서 이러한 기계적 태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더 많지요. 그러나 상투적인 대답과 언어의 감옥에 갖히기 시작하면, 안전하고 편하긴 하지만, 새로운 맥락에 부딛칠때, 이를 월담할 수 있는 생각의 창발을 빚어내진 못합니다.

 

 

또 다른 만남을 기다리며......

 

박웅현 선생님과의 만남은 너무나 짧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눈 언어들은 하나하나 기억의 지층속에 곱게 접어두려고 합니다. 또 다른 과정이나, 혹은 만남을 통해 뵙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곳에서 유학을 하고, 고향이 같고, 나이가 같고, 뭐 우리들은 항상 이런 식의 프로파일링을 통해 서로의 공감대를 찾아가죠. 모임에서도 어디든 '나이를 물어보고 서열관리부터 들어가야' 속이 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런 분들이 불편하더군요.

 

더 문제는 이런 식의 사고와 행태를 보이는 것이, 기존의 창의적인 직업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에게서 더 많이 찾게 되기도 합니다. 사고와 조직이 따로 논다는 걸 그때 알았지만요. 생각을 나눌 때는 특히 "계급장을 떼는 일"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공감합니다. "우리의 재능은 타인의 재능 위에 존재한다"는 말을 기억해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그렇고, 인문학의 대부분의 논리는 사실, 타인의 재능과 사유 위에서, 나의 빛깔을 찾는 일일 터입니다.

 

저 또한 이번 강의를 통해, 방송작가분들이 패션의 인문학에 조금이라도 눈을 뜨길 희망합니다. 툭하면 상의실종, 하의실종, 빵터진 사연, 굴욕사연 이 따위 수사로 점철된 이 나라의 패션소비와 언론의 방식이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이지요. 강의 후, 다음 날 방송 작가분들과 함께 소양강과 청평사를 방문했습니다. 고찰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항상 문고리가 눈에 걸리더군요. 옅은 청록빛의 문과 두 간극을 연결하는 둥그런 원환. 누군가는 이 고리를 보고 문과 문을 연결하는 여닫이로 생각하지만,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는 이 고리를 두개로 엮어 옷과 옷을 연결하는 고름으로 표현했습니다. 20년도 넘은 오리지널 리 선생님의 작품이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만남의 힘은 참 셉니다. 누군가의 정신의 형틀을 깨고, 안전의 감옥에서 '탈주의 꿈'을 꾸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강의라고 믿고 있지요. 그날 제 강의를 들었던 모든 분들에게, 패션이란 은유가 하나의 탈출구가 되길 그저 바라고 바랍니다.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준 방송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리고 산책길에서의 행복한 한담을 나누어주신 박웅현 선생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광고 많이 만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