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패션, 너무나 고혹적인 세계
OBS 전기현의 시네뮤직에서 <영화 속 패션>을 7회 방송했습니다. 7편의 영화를 통해 시대별 드러나는 영화의상과 극의 구조들의 관계, 옷에 담긴 심리적인 의미 등, 다양한 내용들을 15분씩 압축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시네마 패션 폴더에서는 영화 속에서 옷이 맡은 역할과 기능, 기호적인 의미 등, 영화와 패션이 어떻게 연결을 맺는지 살펴보는 글들을 올려볼 생각입니다. 패션은 한 벌의 옷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패션은 각자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특성과 캐릭터를 살려내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극중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거나 단서를 제공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죠. 무엇보다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는 영화의 경우, 패션은 시대의 표정을 전달하는 거울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영화 속 패션 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읽는 또 다른 신선한 관점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
첫 시간, 제가 고른 영화는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가 연출한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입니다. 영화에서 타란티노는10년이 넘는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탄탄한 이야기를 선보였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제 나치의 선전영화를 찍었던 베를린의 스튜디오 바벨스버그에 세트를 설치해서 사실성도 높였죠. 그만큼 영화 속 의상의 고증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영화의상을 맡은 이는 폴란드 출신의 무대의상 디자이너인 안나 쉐퍼드인데요. 그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3년 작 <쉰들러리스트>의 의상으로 아카데미 무대의상상 후보에 오를 만큼,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패션을 가장 정확하게 고증했습니다. 이번 <바스터즈>에서는 역사적 고증의 정확성과 더불어, 드라마를 위해 배우 각자의 개성이 배어나는 의상을 디자인 했습니다. |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1940년대는 패션의 정체기였습니다. 넓고 각진 남성적인 어깨에 짧은 스커트의 드레스가 계속 유행을 했죠. 전쟁 후 옷감배급이 엄격하게 이뤄지면서 실용적인 복장이 등장하는 시기도 이때입니다. 영화 속 쇼샤나가 영화관 간판을 떼며 입는 다소 소년 풍의 의상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유니폼은 모든 민간의 사회적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의상이었죠. 심지어는 결혼식과 레스토랑에 갈 때도 군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를 끈 의상이 바로 사이렌 수트란 것인데요. 공급에 대비, 방공호로 피신할 때 빨리 착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었던 옷이라서 사이렌 수트라고 불립니다. 쇼샤나의 수트가 바로 사이렌 수트에요. 이 수트 위에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일명 캥거루 망토를 걸쳤습니다. 큰 포켓은 방공대피소로 가기 전, 필요한 물품들을 빨리 챙겨 넣어 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가죽이 귀해서 여성용 신발엔 가죽대신 코르크가 사용되었습니다. |
영화 속에서 이중첩자인 브리짓이 입은 갈색 수트는 1940년대의 대표 패션입니다. 실제 모습보단 아름답게 디자인이 되어 있죠. 풍성한 느낌의 갈색 투피스 수트를 보세요. 넓은 어깨와 벨트, 끝이 뾰족한 라펠, 여기에 좁은 단의 스커트를 입었습니다. 앞트임을 주었고 뒤에서 주름을 잡았죠. |
이뿐만이 아니었죠. 여성용 스타킹이 귀해서 대부분 발목양말을 신었고, 스타킹을 신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다리에 갈색 화장을 하기도 했답니다. 쇼샤나의 빨강색 드레스는 원래 검정색으로 디자인을 했다가, 영화제작과 더불어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쇼샤나의 죽음을 상징하기 위해, 빨강색 드레스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
영화 속에서 영화배우인 브리짓 조차, 스타킹을 신지 않은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3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끌어온 이탈리아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옷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디자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앙증맞은 표범무늬 모자와 앙상블 의상을 한 통역관인 줄리 드레이퍼스의 모습은 40년대의 대표적인 메이크업 방식까지 볼 수 있습니다. 뚜렷하고 곡선적인 형태의 눈썹으로 관능적인 미를 드러내고 두툼하게 그린 빨간 입술이 유행합니다. 이 영화에서 줄리 드레이퍼스는 당시의 첨단유행을 보여주는 터번을 쓰고 나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
쇼샤나가 입은 극장 시연회 만찬 자리에서 입었던 붉은 색 드레스는 당시 초현실주의 패션으로 인기를 끌던 스키아파렐리의 영향을 보여주는 옷입니다. 특히 쇼샤나가 입은 드레스와 함께 쓴 토크(작은 모자)와 베일은 당시 최고 패션 아이템이었지요. 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는 당시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살바도르 달리의 친구로서, 그에게서 받은 영향을 패션에 표현했습니다. 패션과 미술의 혼합을 통해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옷의 종류를 넓혔던 디자이너였습니다. 특이한 느낌의 의상을 입고 싶었던 사회인사들은 모두 그녀의 옷을 입고 싶어했죠. 그녀의 옷이 독일 본토에 절대로 수출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영화 상에선 독일에 함락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런 설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
이외에도 영화 속 의상을 맡은 안나 쉐퍼드는 옷의 색깔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을 보여줍니다. 히틀러가 군복 위에 입고 있는 망토는 빨강과 백색, 두 개의 톤으로 되어 있는데요. 원래 이 망토는 로마시대, 장군들이 전쟁터에서 비와 추위를 막기 위해 후드를 달아 입었던 페눌라(Paenula)에서 온 것입니다. 겉은 백색을 사용하여 권력의 순수성을 안쪽은 빨강색을 이용해, 피에 젖은 히틀러의 야욕을 보여줍니다. |
이외에도 <시네마 작전>에 투입된 브래드 피트가 입고 있는 백색의 턱시도는 실제로는 극 중에서 이탈리아 남자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채택된 색깔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브리짓의 패션과 주얼리는 실제 40년대 빈티지 보석들로서, 무대의상 디자이너가 갖고 있는 수집품이라고 하네요. 영화를 통해 복식을 보는 일,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의상학과의 학생들이 숙제로 의례껏 하는 영화 속 패션 관련 분석들과 교수들의 글도 읽어봤습니다만, 어느 하나 양에 차는게 없습니다.
그만큼 옷의 스타일과 양식에만 치중해서 영화 속 패션을 읽어가기 때문이지요. 최근에 상영했던 <아이엠러브>나 <블랙스완> 며칠 전 시네토크로 참여했던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영화들은 한 시대의 대표적인 트랜드를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드러난 옷의 스타일만 착목해선 별로 얻어낼 것이 없지요. 어느 시대나 패션은 존재하고 그 패션을 현대의 새로운 관점에서 변주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옷의 스타일로 정리한 역사만을 머리 속에 집어 넣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최종병기, 활>을 가지고도 고증의 문제를 삼아 비평하는 기자의 글도 읽어봤습니다만, 이 분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극 영화란 그만큼 사실과 허구가 교묘하게 균형잡혀진 작은 세계입니다. 패션도 이런 이야기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한 부분이죠. 고증에만 목숨을 건다고, 영화가 될까요? 그건 학자로서는 되집어볼 문제일 수 있겠지만 실제 영화를 연출하고, 소비자들에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의 관점에선 딱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 속 패션의 세계가 감내해야 할 일부분이기도 하죠.
블로그를 쓰면서 종종 생각합니다. 그저 드라마 리뷰 하나 쓰면 수십만명이 읽는 세대, 그런 시대일수록 드라마의 다양한 양상들을 풀어낼 수 있는 블로그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네마 패션 폴더는 바로 그런 답답함을 저 스스로 조금씩 풀어가려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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