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시네마 패션

패션피플의 필수 다큐멘터리'셉템버 이슈'

패션 큐레이터 2010. 2. 8. 03:30

 

S#1 나는 독재자가 좋다

 

패션이란 단어, 흔히 f-word의 세계라고 불리는 이 황홀과 글래머의 소우주 패션은 과연 어떤 진면목을 갖고 있을까? 오늘 소개할 다큐멘터리 September Issue는 영화 <프라다는 악마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했던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를 다룬다.

 

<프라다는 악마를 입는다>에서 보여준 얼음공주의 이미지, 40억이 넘는 연봉을 받고 갖은 언론의 스폿 라이트를 받지만 가정 생활에선 철저하게 실패한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서 보았을터다.

 

다큐멘터리 <September Issue>는 2007년 9월호 판 보그를 만들면서 생긴 일들을 소소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월간지의 9월호. 패션전쟁이 시작되는 9월호 ‘보그’. 매년 9월호 보그는 기록적인 판매부수의 성과를 이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무게만 2kg, 840페이지로 1300만부가 판매되는 뜨거운 8개월간의 흥미진진한 제작 과정을 담아냈다. 본인도 이 미국판 9월호를 가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할 것이다. 왜 하필이면 9월호냐고 말이다.

 

9월은 가을과 겨울패션의 전반적인 흐름을 짚어내고 시장의 주요한 특성을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새롭게 화보를 만들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응축된 디자인을 선보이려고 전방으로 노력한다. 이때 실패하면 후반부의 장사는 끝인 셈이니까.

 

핵폭탄이란 별명과 더불어 Ice Cold란 애칭을 가진 여자. 한 마디로 얼음공주다. 누군가는 그녀를 가리켜 패션계의 교황이라고 까지 부른다. 강한 카리스마와 결단력으로 머뭇거리는 패션 에디터들의 한 순간 순간을 지배하고, 명령한다. 5만불을 들여 찍은 20페이지 화보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말에 한방에 날라간다.

 

5시 45분에 기상 밤 10시에 취침하고 모든 화려한 파티에 초대되지만 10분 이상 머물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있어 뉴욕은 패션의 새로운 메카가 되었고 바로크 시대 이후부터 세계 패션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파리를 극복한다. 그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곧 주장이며, 트랜드의 한 흐름이다. 한 마디로 세계 여성들의 치마길이를 지배하는 그녀다. 물론 뭘 입을지에 대한 전반적인 코치 또한 포함된다. 라틴 격언 중에 '패션은 가장 강력한 독재자'란 말도 있지만, 사실 그녀의 말 자체, 존재감 자체가 독재자의 면모 그대로를 드러낸다.

 

옷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패션은 사회의 민주화를 달성한다. 그러나 패션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강력한 카리스마적 인물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한 여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패션 저널리즘과 보그란 패션 매거진의 세계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봅 헤어 스타일과 구찌 선글래스를 끼고 매번 패션쇼에 등장하는 여자. 그녀가 오지 않으면 패션쇼는 시작되지 않는다.

 

 

서울 패션위크를 비롯해 나 자신도 많은 패션쇼를 보러가고, 흔히 말하는  VIP 초대도 받아보지만, 그녀가 누리는 그런 호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말이 곧 법이고 패션의 부산한 풍경에 질서를 부여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패션 모델보다 유명인사들이 패션 잡지에 등장하도록 부추긴것도 그녀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Celebrity Culture를 만든 그녀의 세계, 배후의 모습을 찍는다. 9월호를 찍기 위해 전쟁에 돌입한 보그지의 다양한 면모가 등장한다. 패션 에디터들과 관리 에디터, 사진작가와 스타일리스트들이 달라붙어 화보를 만들고 테마를 기획하고 이야기를 불어넣는다.

 

 

난 개인적으로 그녀가 가장 부러운 건 패션 디자이너들을 직접 만나, 갓나온 옷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패션쇼를 다갈 수 없는 만큼, 정보지나 분석자료를 통해 디자이너들의 경향을 살펴볼 때가 많은 나로선, 그녀의 세계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신문 편집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찌보면 운명적으로 잡지사 편집장이 되어야 했던 여자. 처음에는 패션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다는데, 그녀가 집어내는 논평 하나하나가 칼끝처럼 날카롭다. 가령 옷의 이미지 작업 보다 소품이나 직물의 특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과거의 예를 기억해내서 비교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번 패션 다큐멘터리에서 새롭게 발견한 또 하나의 인물, 바로 그레이스 코딩턴이다. 위의 사진에 안나 옆에 서 있는 여인이다. 60년대를 풍미한 패션 모델이자 지금은 미국판 보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일을 한다. 사사건건 자신의 철학에 찬물을 끼얹는 안나와 말다툼을 벌인다. 화보의 이미지 하나를 놓고도 설전을 벌이는데 문제는 두 사람의 관점이 정말이지 다 마음에 든다는 걸 거다. 5만불을 들여 찍은 화보를 하나하나 제껴놓는 통에, '기분이 더럽다며' 카메라를 향해 쓴 웃음을 짓는 그녀 또한 미국판 보그를 이끄는 실제적인 힘이다. 많은 이들이 안나 윈투어의 이름은 기억해도 그레이스 코딩턴이란 이름은 거의 모른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좀 다르다. 노먼 파킨슨을 비롯 세계적인 패션 사진가들과의 협업에는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한 그레이스의 면모가 녹아있다.

 

 

후배들 중에 패션 저널리즘 쪽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 중엔 편집장도 있고 스타일리스트도 있는데, 한번은 전화 통화중에 '보그쪽 사람들은 웃기지도 않은 자존심 같은 것'이 있다며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그만큼 일종의 선민의식 같은 것일거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한국에서의 보그 매거진을 생각해봤다. 패션 매거진 시장은 점점 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고, 판매부수도 점점 줄고 있다. 패션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매체나 통로가 늘어나면서 예전의 그 힘은 기대하기 힘들다. 게다가 안나 윈투어와 맞짱을 뜰만큼, 정보력으로 무장한 패션 블로거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에게 끌리는가. 아니 패션계는 왜 그녀를 필요로 하는가 말이다. 이 대답이 중요할 듯 하다. 대한민국에 자칭 유명한 패션 블로거들이 한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패션계의 독재자가 못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단호하다. 온라인판 블로거들은 리뷰어일뿐, 비평가들이 못된다. 패션쇼를 보고 정보를 주고 해명을 할 순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방향성을 보여주진 못한다. 이건 꼭 패션만의 문제가 아닐거다. 미래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트렌드를 단순히 해석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밀어부치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만큼을 뒷받침하는 재력과 조직이 있어야 한다. 패션 보그가 가진 장점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그녀의 모습, 특히 패션 에디터가 되길 바라는 엄마의 소망과는 달리, 로스쿨에 가고 싶다는 딸과의 대화 장면이 인상깊었다. 20년동안 자신이 만든 모든 보그지를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화이트톤의 서재도 멋졌다.

 

 

이번 한예종 자유예술캠프에서 "패션과 미술의 콜래보레이션'을 강의했다. 이제 6강의 수업중 마지막 한 차례가 남았다. 수강생들과 토요일 오후에 이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패션계의 논리, 혹은 그 면모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다큐멘터리 자체가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혹할 정도로 멋진 작품이었다. 디자이너 이사벨 톨레도와 오스카 드 라 렌타, 장 폴 골티에도 직접 나와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무엇보다도 패션잡지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9월호를 만들며 치열하게 서로 맞물려 싸우는 모습도 하나의 텍스트가 될 것 같다. 잡지 페이지 하나하나의 레이아웃과 전체의 의미를 잡아가고, 그 과정에서 각 부서별 갈등도 면밀하게 드러난다. 세상에 참 쉬운게 없지 싶다. 이번 영화를 통해 배운 것은, 패션의 이미지를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과 손길이다. 어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타성에 젖지 않을 수 있는지. 쉽지 않은 일이다. 5년 정도만 한 분야에서 일해도, 다 아는것 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하긴 거장이 된다는 건, 끊임없이 자신의 틀을 깨뜨리는 능력을 가졌는가의 문제일거다. 나 또한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하고 싶다. 패션계를 배우려고 영화를 봤는데, 오히려 그녀에게서 오랜동안 성공의 길을 갈수 있는 자의 손목을 본 것 같다. 그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