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시네마 패션

신화가 된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영화 <라무르>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1. 9. 2. 15:19

 

 

패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패션 디자이너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최근 얀 쿠냉 감독의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시네토크에 참가했다. 복식사와 패션미학, 풍속사와 문화사를 기반으로 영화 한편을 읽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에게 열심히 알리려고 노력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를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그가 창조한 옷만을 바라보는 작업이 아니다. 그가 창조자였건 혹은 수용자의 입장이건, 중요한 건 인간은 그 시대의 구조 속에서 '자신만의 입장'을 직조하고 장식하며, 변주하기 마련이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들을 보다보면, 디자이너의 인생이 보일 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을 흐르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과 이에 맞서거나 혹은 수용하는 인간의 다양한 양상이 보인다.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창작을 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천재성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라무르>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나는 복식사 연구자를 대변하기 이전, 미술 컬렉터로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 패션과 현대미술의 뗄레야 뗄수 없는 연관고리. 역사 속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왜 이렇게 하나같이 예술품 컬렉터들이 많은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다큐멘터리 <라무르>에서도 그의 평생 오른팔이자 동반자였던 피에르 베르제의 회상과 멘트로 시작한다. 1958년 이브 생 로랑이 맡은 디올 사의 첫번째 컬렉션(그가 크리스천 디올의 후계자로 지명된 후) 에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베르제와 만난다. 이후 그들의 열렬한 사랑과 추억이 이 영화 한편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이브 생 로랑이 죽은 후, 베르제는 그들이 평생동한 수집한 미술품을 경매사에 내놓는다. 한화로 6천억에 달하는 세기의 경매였다. 이 금액은 에이즈 재단에 기부되어 그 뜻을 높였다. 중요한 건 금액이 아닌, 컬렉션에 포함된 현대미술의 거장들과 그 터치, 영향력이 패션과 어떻게 맞물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있는 마조렐 정원 그리고 노르망디의 샤토 가브리엘을 오가는 이브와 피에르의 동선에는 패션과 현대미술이 어떻게 접합되는지, 그 궤적을 꼼꼼하게 추적하며 한 벌의 옷을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시킨 디자이너의 삶이 녹아있다.

 

 

1936년 8월 1일 알제리의 북서부 파삭파삭한 대서양 기후가 삶의 여건을 풍족하게 만드는 오랑 해변에서 태어난, 이브 생로랑은 패션의 역사에서 전설이 된 이름이다. 소더비의 패션 분과장인 캐롤린 레널드 밀뱅크는 <쿠튀리에, 위대한 디자이너들>에서 그를 가리켜 "과거 25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를 뽑으라면 역사 이브생 로랑이 아닐까. 쿠튀르를 통한 디자이너의 부활시키고, 60년대의 전후 잿빛 도시에서 여인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남자" 라고 극찬한다. 

 

여성들을 위해 턱시도 수트를 발표하고, 런웨이 쇼에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여성들을 기용, 미의 다양성을 변호하고자 했다. 그만큼 그의 디자인에는 유럽 중심주의, 백인유럽남성의 흔적을 스스로 파괴하며, 창의성의 극한을 달렸던 흔적들이 녹아있다. 17살의 나이에 디자이너 크리스천 디올의 보조로 들어가서 4년후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1953년 신인 디자이너 발굴 컨테스트에서 내놓은 3편의 스케치, 국제양모협회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항상 신인 디자이너들을 위한 컨테스트를 열심히 열었다. 이 대회에서 3등상을 받았던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인 이가 바로 당시 프랑스판 보그지의 편집장이었던 미쉘 드 브뢰노프였다. 이브 생 로랑에서 디자인 수업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이후 파리의 의상조합학교에 입학, 정식으로 패션의 기초들을 익힌다.  이후 국제양모협회 컨테스트에 다시 나가서 경쟁자들을 물리쳤는데, 여기엔 바로 오늘날 샤넬과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젊은날의 칼 라거펠드도 들어있다.  

 

디올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21살의 나이에 그의 후계자로 등극, 파리 패션계를 누볐다. 처음부터 그가 파리의 패션계로 부터 호평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디자인한 호블 스커트와 비트 세대의 패션은 공고하고 보수적인 파리 패션계엔 썩 마뜩찮은 신호였다. 그러니 언론들은 그를 가리켜 물어뜯고자 했던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 싶다. 1960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그는 자원입대를 하지만 디오르 하우스의 회장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당시 언론계의 파워10걸 중 한명이었던 그는 각종 언론에 그를 징집하지 말아달라는 공문을 보낼 정도였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하나씩 살펴본다기 보다는, 그가 가진 현대미술에의 애정, 이로 인한 상상력들의 교차, 연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숲에서 어떻게 디자이너로서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야수파 앙리 마티스의 회화에서 그는 강렬한 색감의 정서를 익힌다. 몬드리안의 추상작품에서 그는 아이디어를 얻어 아예 몬드리안 룩이라 불리는 유명한 작품을 남긴다. 몬드리안은 이후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영감의 보고가 되었고 오늘날 패션 브랜드에서도 이 무늬를 이용한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남기고 있다. 무늬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보다 길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건 역시, 평생의 동반자이자 시인이었던 베르제의 논평들이 아닐까 싶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어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최종의 평가를 내린다. "터너가 없었더라면 영국은 안개의 가치를 몰랐을 것이다"라는 유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안개는 터너 이전에도 런던의 거리를 가득 매우던 것이건만, 그를 통해서 비로소, 런던의 사람들은 도시를 감싸안은 안개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참 무서운 말이다. 예술가의 감성을 통해, 진부하게 우리 곁에 있었던 그 어떤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말이다. 디자이너들과 창의성에 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던지는 한편의 비수같았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하는 세상. 새로운 창작보다는 기존의 것들을 재조합하고, 패러디하고, 콜라주를 통해 새로운 구성의 미에만 눈을 돌렸던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이 말은 유효하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 여기엔 너무나 낮익은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그 낯섬을 통해 우리 안에 잦아진 감성을 벼리는 일. 디자이너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철학이지 싶다.

 

 

기성복의 시대, 대량생산의 시대가 되면서 디자이너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말한다. 꼭 그럴까? 패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한 시대와 맞닿아, 치열하게 시대의 속살을 보려고 했던 한 인간의 시선이 아닐까? 이것이 없는 이들은 항상 다른 것에 의존한다. 타인의 권위, 학벌, 돈, 함부로 배껴내는 타인들의 저작 등등. 결국 시대를 맞서는 건 타인이 만든 갑옷을 입는게 아니라, 내가 만들고 입는 옷의 렌즈로 시대를 보는 것이다.

 

시대를 살아가는 것,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 그 과정에서 명성도 돈도 얻는다. 말년의 이브 생 로랑의 외로운 모습에 눈길이 갔다. 명성이란 눈물만큼 짠 잠시의 화려함이란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시대를 풍미한다는 것은 그 짭조름한 눈물의 깊이만큼, 어둠과 빛을 같이 봐야 한다는 뜻일거다. 이브 생 로랑, 그를 여전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