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원고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여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 새롭게 시작한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나누는 즐거움이 솔솔한 건 좋은데, 저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그래도 행복한 건 페이스북을 통해 세계적인 패션 전문가
들과 의견을 나누고 앞두고 있는 패션 전시에 관한 조언을 듣는 건 온라인만이
줄수 있는 혜택이지 싶다. 패션 전시 관련 글이 인기 유무에 상관없이
실제 한국의 유력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좋은 일이고, 나로서도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최고의 구두 디자이너와 오랜 동안 페북으로 수다를 떨고
이상봉 선생님과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것. 더 멋진 건 패션 큐레이션
영역에서 나 보다 먼저 앞 길을 걸어간 쟁쟁한 복식사가들과 큐레이터들과의
만남이었다. 엘리사 디먼트와 쇼나 멀레이, 발레리 스틸에 이르기까지 꼭꼭 숨어 있던
그들을 찾아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얻으며 어찌나 행복하던지. 이런게 진정한
온라인의 힘이라고 믿게 된다. 사람많이 들끓는다고 그 휘발적인 인기가
영속적인줄 착각하고 사는 어리석음에 빠져 살기엔 온라인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고 다채롭다.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선생님이 메일을 보내셨다. 앞으로도 전시내용을
많이 소개해달라는 부탁이다.
오늘은 지금 현재 진행중인 파리 카르나발레 미술관의
<루이비통>전시회를 골랐다. 카르나발레 미술관은 신고전주의
미술 작품들이 많아서 파리에 갈때마다 당시 옷의 역사를 복습할 겸 자주
들르는 미술관이다. 하나같이 가발을 쓰고 견고한 검정색 수트에 하얀
크라바트, 오늘날 넥타이의 전형을 맨 남자의 초상이 도처에 있다.
이 전시는 작년 9월 중순에 시작 올 2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이 미술관에 들를 때마다 꼭 가는 방이 있는데
바로 여기엔 위에서 보는 프랑수아 제라르라는 신 고전주의
시대 최고의 작가가 그린 마담 르카미에 부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대중 미술서들을 자주 읽어본 분들을 알 것이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서
금융재벌과 결혼했지만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림 속 고혹적인 모습에 끌려
신고전주의 패션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마냥 손을 뻗쳐 그녀의 옷을 만지고 싶었다. 마치 실크
오건자로 만든 듯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백색 린넨이다. 옷 무게가
거의 그램으로 측정하던 때니 얼마나 가벼울까.
가슴을 환하게 드러낸 여인의 데콜테 아래로
엠파이어 라인의 매혹적인 드레스가 우아하게 떨어진다.
그 위로 황금빛 캐시미어 숄을 덮은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지금 태어났어도 '미의 종결자'가 되었을 그녀....가 보고싶다.
이번 카르나발레 전시는 어찌보면
루이비통의 통사를 다룬 최초의 전시라 할 수 있다.
특히 '여행'이란 관점을 통해 여행용 케이스로 150년 넘게 인기를
끌어온 루이비통의 역사를 조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브랜드 입지를 다시 다지려는
의도라 볼 수 있겠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카르나발레는 정원이 참 예쁘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 볼 점은 가방이란 소품 하나를
여행이란 관점에서 풀어내기 위해, 루이비통의 모든 자료와 사료를
다시 재점검하고 이에 맞춰 테마화했단 점이다. 보통 브랜드의 역사를 다룬 전시는
브랜드 자랑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큐레이터로서 이런 전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큐레이터인 로즈 마리 무소와 전시 디렉터인 라파엘 제라르의 연출이 돋보이는 전시다. 트렁크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올 화이트 조명에 강한 빛을 이용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858년 오페라 거리에 처음 이 루이비통 공방이 생기고 이후
1918년 샹젤리제 거리에 1954년엔 마르소 거리에 다시 샹젤리에에
플래그십 스토어가 생겼다. 루이비통 트렁크는 여행 액세서리의 아이콘이다.
이번 전시와 함께 도록으로 만들어진 <루이비통, 전설의 트렁크 100>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나 또한 발 빠르게 신청했다. 우리는 흔히 루이비통이라고 하면 핸드백을 비롯한
여성용 백에 한정된 생각을 갖기 쉽다. 하지만 옷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트렁크며 침대용 트렁크,
차를 담는 다과용 트렁크, 화장품 케이스, 서커스단의 동물을 담기위한 케이스 등 지금껏
생각치 못한 루이비통의 다양한 캔버스 제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처음엔 약간
쌍심지를 켜고 전시를 임했는데 이 정도면 브랜드의 역사를 조명하는
정도의 깊이가 내가 생각한 이상을 뛰어넘었다.
루이비통을 즐겨 사용한 세계적인 명사들은 다음과 같다.
소설가 헤밍웨이, 현대미술작가인 데미언 허스트,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나
샤론 스톤 같은 영화배우들과 잔느 랑방과 칼 라거펠트 또한 이 루이비통 트렁크를 사랑한 이들이다.
루이비통은 당시 여행용 트렁크 제조사였던 무슈 마레샬 밑에서
7년간의 도제 생활을 했다. 1854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까지
도합 17년의 세월을 그와 함께 트렁크를 연구했다. 그의 제품 공방은 당시
패션 하우스들이 밀집해있던 방돔광장에서 가까왔다. 1860년대에 들어 그의
사업을 일취월장했다. 트렁크 뿐만 아니라, 여행용 러기지도 이때 제작했는데 아쉽게
도시 재개발로 파리에서 아스니에르로 공방을 옮겨야 했다. 1867년경 그의 공장 주문량을
미어터지는 정도로 성장, 당시 프랑스 파리가 유럽의 문화예술중심지로 발돋움 하도록 도와준
파리 세계 박람회 때 1천 5백만의 관람객이 자신의 매장과 부스를 들렀다. 이 때 제품을
들고 나간 회사만도 5만 2천여개였으니 한 마디로 대박인 셈이었다. 이 박람회에서
루이비통사는 동메달, 3등상을 받았다.
1871년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전쟁이 끝난 후 비통은 아스니에르 공방과
더불어 신규 점포를 열었다. 이 점포는 주로 여행제품 판매에 총력을 기울였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제품'의 아이콘으로 진수할 준비를 마친다. 1875년 루이비통은
당시 세계적인 여행가인 사보냥 드 브라조에게 콩코 지방을 여행할 수 있도록 침대로 쓸 수 있는
가방과 트렁크 제작을 주문받았다. 접이식 프레임을 트렁크에 적용한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프레임 위로
얇지만 편안한 메트리스까지 튀어나오도록 설계한 것. 사보냥은 그의 기술력에 경악했고 그의 명성은 이후 급속도로
퍼진다. 비통의 아들인 조르주가 결혼하면서 신규 점포를 아들과 그의 아내였던 조세핀에게
넘기고 자신은 예전 공방이 있는 아스니에르로 돌아간다.
원래 루이비통 트렁크의 패턴은 줄무늬 캔버스였다.
그러나 라벨이 점점 인기를 끌면서 많은 업자들이 하나같이 배껴
먹는 통에 1889년 루이와 조르주는 자신의 시그너처 패턴을 바꾸었다.
베이지색 바탕에 넓은 갈색의 드래프트 보드 패턴을 쓴 것이다. 이 패턴을
상표화하면서 흔히 데이미어 캔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1932년 찻잔 세트 보관을 위한 트렁크 © 루이 비통 아카이브
루이비통의 제품에 대해 꼼꼼히 연구하면서
무엇보다 루이의 장인정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새롭게 눈을 뜨고 있다.
원래 오늘 글은 이번 3월호 <브뤼트> 매거진의 패션 특집호를 위해 쓰던 글이다.
내용의 일부만 발췌해서 정리해 넣었다. 올 3월호 페이지가 무려장장 25페이지다. 패션의 역사를
통해 '한땀한땀'의 장인정신의 진화과정을 아이템 별로 살펴보려고 한다. 루이비통의
역사는 곧 '여행'의 역사이며 그 역사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무늬와 형태를
변형시키되, 가장 중요한 바느질과 가죽처리에 관한 기술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회사다. 이런 점만큼은 지적하고 싶다.
Image Courtesy by Louis Vuitton Archive
트위터 https://twitter.com/#!/fashioncurator 로 오셔서 함께 패션에 대해 수다떨어주세요.
'Art & Fashion > 패션 필로소피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골무 (0) | 2011.02.16 |
---|---|
패션, 예술의 패션(Passion)을 되살리다 (0) | 2011.02.08 |
패션스타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 (0) | 2011.01.30 |
패션을 건축하는 남자-이세이 미야케展 리뷰 (0) | 2011.01.28 |
내가 명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0) | 2011.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