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아이의 그림에 미술의 본질이 있다

패션 큐레이터 2010. 5. 30. 23:15

 

김부연_베네치아의 추억_캔버스에 유채_72×121cm_2010

지난 주 영화 <시(詩)>에 대한 애잔함이 여전한 탓일까요.

이번 주말은 조용히 보냈습니다. 한복 짓는 예쁜 여자 외희님께 마실가서

천을 40여장 찟어 포장재료 만들며 토요일을 보냈고 오늘은 유아원 봉사가서 아이들과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른의 관점을 투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색감이며 밀도, 형태의 묘사 등에 있어, 기존의 지식을 강요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모든 걸 잊고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정말이지 놀라운 세계가 열립니다. 

 

김부연_아이_캔버스에 유채_89×116cm_2009

작가 김부연의 그림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추구하는

화가입니다. 프랑스에서 오랜동안 현대미술의 담론과 테크닉을 연구한 작가가

도달한 지점은 의외로, 아이들의 순수한 시선에 걸린, 세계의 가벼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색감이며 손맛이 어찌나 경쾌하고 밝은지요. 어두운 담즙이 가득한 우울한 날 그의 그림은

힘을 주는 비타민 같기만 합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흔히 철학에서 말하는 선험적 세계

그 자체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에 대한 해석, 이를 위해 배우는 모든 체계들

-지식이나 문화, 이념, 통제된 감정들-로 부터 자유로운 것이죠.

 

흔히 사회학에선 이를 아비투스(Habitus)라고 한다지요?

교육을 통해 습득한 정신의 습관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김부연_여인과 집_캔버스에 유채_163×131cm_2010

작가는 아이의 낙서 그림, 혹은 크레파스화를 모티브로 삼아

미술이란 거대한 담론행위의 근본을 사유합니다. 아이들이 그리는 낙서라는

이 단순한 행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여백위에 풀어놓은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 세계와 함께 뒤엉켜 즐겁게 노는 '놀이의 규칙과 시간' 그 마법의 순간들을 찾아낸 것이지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낙서 속에서 창작의 출발인 놀이와 즐거움을 찾아 다시 재현합니다. 아이는 물들지

않은 만큼, 기존의 모든 기법과 형식을 파괴하고 자신의 망막에 맺힌 주변의 세계를 괴발새발 그려낼 뿐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그 세계가 정작 원근법(Perspective)으로 대표되는 어른의 세계, 자연을 거세시킨

문명의 발톱에 긁히지 않은 그림이기에 아이의 그림은 '나'를 주체로 하지 않는 타자와 내가 섞이는

 다양한 시점을 한 화면에 드러냅니다. 그 세계는 조화와 평화의 세계인 셈이지요.

 

김부연_pink city_캔버스에 유채_100×81cm_2010

작가 김부연은 아이들의 그림 속 세계에서 그 기법을

차용해 그림을 그립니다. 사자를 그릴 때, 얼굴은 정면으로 몸은 측면으로

배치하죠. 사자의 갈기는 둥근 원형 형태로 마치 태양의 열기처럼 퍼져갑니다. 아이들의

눈이 사물을 볼때, 다양한 시점을 통해 재구성 하기 때문이지요.

 

김부연_새를 먹는 호랑이_캔버스에 유채_65×53cm_2010

아이들의 그림은 단순하고 화려하며

밝은 색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직 아이의

망막속에 비친 세상의 빛깔이며, 이는 다시 말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세상의 빛깔이며 형상이기도 한 것이지요.

 

김부연_사자_캔버스에 유채_60×73cm_2009

참 특이한 것이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손 쉽게 따라 그릴 수 있으려니 하고 크레파스를 들어

도화지에 작업을 해 봅니다. 그런데 생각같지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며 내 주변의 사물의 이름을 외우고 명명하고, 그들의 논리를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여백 속에 자꾸 채워내려는 마음이 강한 탓입니다.

 

다시 도화지에 대고 선을 긋습니다.

이 선이 나와 누군가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선이 아니라

그/그녀와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둥그런 원을 갈무리 하는 선이 되길

바랍니다. 그 세계를 회복하고서야, 도화지 속에 다시 떠오르는

신기루 같은 얼굴들, 우수수 쏟아지는 달빛같은 그 여린

상처들을 제대로 보게 되겠지요.

 

김부연_세느강변의 하루_캔버스에 유채_60×72cm_2009

굳은 살 배긴 뒤발꿈치의 각질을 베어내며

아이들의 그림을, 김부연이 그린 그림을 보고 또 보고 합니다.

작가가 그린 비틀거리는 직선은, 세상엔 직선형 고속도로처럼 뻥뚫린

길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하네요. 아이들의 미술을 통해 미술의

즐거움과 본질을 되세기고 싶을 때, 이 한장의 그림이 주는 여백과

그림자의 두께를 세어보며 낮은 한숨을 내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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