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책 읽기의 황홀

인생은 놀이의 연속-허허당 스님의 <비고 빈 집>

패션 큐레이터 2010. 5. 1. 00:30

 

 

 S#1 텅빔을 향하여.....

 

인사동에 나갔습니다. 블로그로 알게 된 오랜 지인을 뵈었고, 함께 동석하신 분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책 한 권을 주십니다. 허허당 스님의 <비고 빈 집>입니다. 이 책의 기획을 맡으셨다고 하더군요.

 

미술계에서 활동한지도 이제 10여년이 넘어가다 보니, 많은 이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이 '이 작가를 아는가'입니다. 사실 미술 컬렉터로 활동했다고 해도 모든 작가를 다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미술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가 아니라면 일년에 수천회에 이르는 개인전이 열리는 데, 모든 작가들을 기억할 수도 없고, 사실 기억해야 할 필요도 없죠.

 

미술은 결국 개인의 취향의 정점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호불호가 상당히 명확하게 나뉠 수 있는 분야지요. 저 또한 지금까지 반쪽짜리 컬렉터로 살아왔던 게 사실입니다. 대부분 유화중심이었고, 조각이나 설치, 사진, 제가 좋아하는 패션을 비롯 공예 부분의 작가들을 찾는 데 게을렀지요.

 

지난 3년동안 <하하 미술관>의 작가들을 찾으면서 신인작가들을 발굴했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여전히 다양한 장르를 포섭할 지식이나, 네트워크를 쌓는데는 한 없이 부족한 편입니다. 더구나 종교미술로 일컬어지는 탱화나 한국 전통 불화, 혹은 선화는 거의 까막눈에 가깝지요.

 

어린시절 중광스님의 그림 몇 점에 관심이 가서, 기사를 찾아보거나 글을 읽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잘못인 것이, 미술이란 독립적 장르에 종교라는 프리즘을 들이대는 일체의 시도를 고깝게 생각해왔죠. 사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그림 자체 보다는 '신앙의 인맥'을 이용해 그림을 팔려는 화가들도 많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런 이들을 비난할 필요도 없고, 세월이 흘러서 당대의 시선을 받을 만한 작가라면, 그런 내공과 힘을 가진 예술가라면, 누군가에게 픽업되고 중앙 무대에 설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잊혀지는게 냉엄한 예술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수요를 만들려고 해도, 그 작품이 시대의 상처와 환희, 의미와 맥락을 짚어내지 못하면, 바로 사그러드는 것이 모든 예술의 결과물이겠지요. 사정이 이러니, 불교미술이나, 혹은 스님의 그림은 전시회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받은 <비고 빈 집>은 허허담 스님의 선화집입니다.

 

처음엔 그저 생각없이 받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와 이미지들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놀랍습니다. 선화란 한 마디로 불교적 선을 화두로 담아낸 그림을 말합니다. 마치 일본 특유의 단시 하이쿠처럼, 정갈하게 갈무리된 시편과 어울린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허허당 스님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모든 풍경에는 동자승들이 일렬로 집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더불어 숲을 이룬 나무들의 군생같지만, 미세한 관찰을 통해 보면, 인간이 숲을 이루고 내면의 풍경을 구성하는 것이죠.

 

 

 

허허당 <선승의 눈_覺>과 <인류의 꿈_자유>

 

선종의 이상은 빈번히 특유의 예술양식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선화입니다.. 선(禪)에 몰입한 사람이 득도의 순간에 스승이나 경전의 도움 없이 얻게 된 직관적이고 개별적인 깨달음을 넓은 화면에 단색의 먹을 사용하여 암시적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채색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전통적인 불교회화와는 달리 수묵위주의 감필(減筆)화법으로 그립니다. 감필이란 동양화에서, 형식적인 면을 극도로 생략하여 사물의 본바탕을 간결한 필치로 그려 내는 상징적인 화법을 말합니다. 표면의 느낌은 거칠고, 회화적인 밀도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만큼 사색의 공간을 확 트여놓았다고 할까요?

 

허허당 스님의 그림을 보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자유로움' 그 자체입니다. 붓을 던져 학을 그리고, 그 학이 소리를 내어 하늘이 깨어나는 것. 일필휘지에 생명력 가득한 존재를 담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검정 수묵으로 표현된 학의 실루엣보다, 붉은 눈가의 기운에 관심이 가는 이유지요.

 

  

  

허허당 <니가 최고야>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인간의 몸 속에 담긴 수많은 동자승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사회 속으로 등장, 성장, 발전, 사멸해가는 과정 속엔, 타자의 모습이 거울처럼 반영되어 있지요. 저는 인드라망의 철학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온 우주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비춘다는 것. 한 사람의 상처에 떨림과 아픔을 경험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내 호심경에 비추이기 때문이겠죠. 기독교에 비해, 불교는 굉장히 유기체적 사고가 깊이있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오면서 불교적 상상력이나 담론에 대해, 가장 부러운 부분이기도 하죠. 물론 기독교도 인간과 인간의 사이, 그 여백을 매우고 견고하게 조율하는 법에 대해 성경을 통해 천명합니다. 하지만 그 관계란 매우 미시적인 속성이 있고, 온 우주에 이르기보다는, 교회내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게 옳죠.

 

서로가 몸을 이룬다고 말을 하지요. 지체들이 몸 속 뼈가 서로 상합하여, 무게의 균형을 이루듯, 교회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정립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에게 반영하는 거울인것을 말해주는 것이죠.

 

허허당, 말 그대로 비고 빈 집입니다. 스님의 이름이 허허당인 것은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실과 잃어감' 대신 적극적 '비움'을 이야기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네요. 작가 이외수 선생님이 이 책의 서문을 쓰셨습니다.

 

선화 작가이기 전에 시인인 허허당 스님의 시를 가리켜 "가시가 살에 박혔을 때처럼 탄성을 지르게 한다"고 서문을 썼군요.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아포리즘 중에, <죽음을 선택하라>라는 제목의 시를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온 몸이 소롯하게 얼어붙었다가, 시편 옆에 있는 외로운 영혼을 그린 그림을 물끄러미 봤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합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한 줄의 시를 쓴다는 것은 한 번의 죽음을 의미하고, 한 장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한 번의 화장을 의미하는 것. 참으로 죽지 않는 것은 예술일 수가 없다. 진정하나 예술은 반드시 죽음을 선택한다. 시는 어떻게 쓰는가 손, 머리, 의식, 아니다. 시를 쓰는 것은 몸이다. 그러나 몸은 시를 쓰지 않는다. 몸은 죽어 환생한다. 시의 몸으로. 진정 살아 있는 시는 몸과 시를 맞바꾼다."

 

최근 서양철학에서도 인간의 몸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아주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죠. 이것 때문에 메를로 퐁티나 스피노자까지 열심히 뒤적이고 있긴 합니다. 저는 이 한편의 시가 왜왜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지요. 글을 쓰면서 나는 과연 죽음을 얼마나 경험했나를 물어보게 되네요.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한 번의 화장이라면, 그렇게 나 자신을 불태워 한줌의 재로 순환하는 것이라면, 미술작품에 대한 글쓰기는 재가 된 몸에 생명의 살을 붙이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의 그림 한장에 환생을 돕는 매개가 되고, 도솔천을 건너는 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전히 그런 경지는 멀기만 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세계임을 뼈져리게 아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한 획 한 획에 알알히 박혀 있는 사유의 꽃들이, 그림 속 마치 직소퍼즐처럼 조밀하게 서로의 몸을 끌어, 한편의 세상을 그려내듯, 그림도 그림이지만, 선시가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놀랍습니다.

 

"Light strikes the void and the void cries. Be not reckless for the void too is life.

"빛이 허공을 때리니 허공이 운다 함부로 하지 마라 허공도 생명이다"란 싯구를 읽어봅니다.

 

깊음이 보이지 않는 상처에 시달릴 때, 인간이란 가시에 찔린 아픔 앞에서 선홍색 정신의 피를 흘릴 때, 우리들은 허공을 향해 절규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다보니, 이젠 그런 행동 또한 함부로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랜동안 연극을 하면서 관객과 배우가 사라진 빈 공간, 무대를 생각해 왔습니다.

 

제대로 된 배우와 연출자는 그 빈공간을 연극의 생명이 피어나는 장이라고 설명하죠. 왠지 이 싯구를 읽으면서 연출가 피터브룩의 말을 떠올린 건 무리가 아니었지 싶습니다. 생각지 않게 좋은 선화집을 만났네요. 이런 책은 한 달음에 읽으면 안됩니다. 한줄 한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성껏 한줄의 선을 긋듯,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감정의 가면을 쓴채, 글을 읽으며 그 상태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직시할 수 있다면, 작은 깨달음이 하나로 오롯하게 뭉쳐, 화엄의 세계를 이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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