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구멍이라도 난걸까요? 글을 쓰는 지금 격자 무늬 창틀을 세차게 때리는 9월의 가을비는 너무나 빳빳하게 직립으로 쏟아집니다. 이 기나긴 인디언 섬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물 뭉텅이는 언제쯤 자신의 기갈을 다 채우고 그만두려는지. 궁금합니다. 무성하던 진초록의 자리를 채우던 대리석 포도 위로 견고한 가을의 시간이 지나갑니다. 이러다 갑자기 한기가 차오르지는 않을지 걱정되네요.
추석이 되면 분주한 일상의 풍경 속으로 편입되는 저로서는, 부침개를 부치고, 친척들이 올 때마다 상을 내고, 뭐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봐야 내일 반짝 하루지만, 모든 준비를 마친 지금, 한강줄기에 뿌리박힌 다리가 점점 더 짧아져서 걱정입니다. 집에 놀러올 친지들에게 문제가 없어야 할텐데요. 어찌되었든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여러분께 이번 추석 때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시집을 골랐습니다. 박라연 시인의 <빛의 사서함>. 제목도 단아하지요. 아침 저녁으로 피부에 와 닿는 한기가 쓸쓸한 요즘엔, 손으로 눌러쓴 구식 편지 한통 받고 싶습니다. 인간의 선혈로 덧칠한 발그레한 사서함 속으로 손을 헤집어, 누군가를 나를 생각하며 썼을 몇 자의 안부라도 읽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시인 박라연을 좋아합니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라는 시집을 시작으로 무용하는 남편과 시 쓰는 여자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이 끌려 읽게 된 시편들이 이제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가난한 신접살림 하던 그녀도 이제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었군요. 세월이 흘러 만난 그녀는 여전히 예의 긍정성으로 가득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가 있는데요. <상황그릇>이란 작품입니다.
"내 품이 간장 종지에 불과한 데 / 항아리에 담을 만큼의 축복인 생긴 들 무엇으로 빨아들일까 / 넘치면 허공에라도 담아보자 싶어 / 종지에 추수한 복을 담기 시작했다 / 붓다 또 붓다 보니 / 넘쳐 흐르다가 깊고 넓은 가상 육체를 만든 양 / 이미 노쇠한 그릇인데도 / 상황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 져 줄때의 형상이 가장 맛, 좋았다"
추석명절이 끝나고 나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인터넷과 신문지상에 나열되는 단골기사가 있습니다. 바로 추석 증후군, 주부들의 이혼 줄이어......뭐 이런 글들입니다. 올 추석은 유독 휴가기간이 길어 해외로 간 분들도 많던데요. 이런 분들은 상기의 기사를 보고 흥분할 필요는 없겠죠. 다만 일년에 한번 가족과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 서로에게 따스한 말들만 주고 받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 함께 할 친지가 있다는 것은 항아리에 담을 만큼의 축복입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다보니, 시끌벅적한 한 때의 부산함도 축복일 수 있을거란 마음의 여백이 생겼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간장 종지에 비유하며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모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추적합니다. 상황에 따라, 무조건 이길려고 기를 쓸 때가 있는가 하면,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저줄때도 있다는 것. 그런 여백을 가질 때, 우리의 마음은 세월의 빛깔을 닮아 발효되는 달보드레한 간장의 맛을 닮아가는게 아닐까요.
내일이면 친척들이 몰려들겠군요. '장가는 언제가냐'는 짜증나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할테고, '어렸을 때는 예쁘더니'란 말도 들어야 할테지만 뭐 괜찮습니다. 이 비루한 지상에서 나와 함께 동일한 혈흔의 자국을 갖고 태어난 이들과 늙어가며 기뻐하고 싶습니다. 모른 척 져주면 되지요 뭐. 항아리에 담을 만큼 큰 축복을 담을 종지 하나 내 마음에서 키우러면, 단단히 내일 하루 보내야겠습니다. 생의 긍정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인 박라연의 책을 큼직하게 찍어 올려놓아봅니다. 행복한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되시길 바랍니다. 잊지못할 멋진 추석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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