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동구리에게-무상급식의 의미를 묻다

패션 큐레이터 2010. 2. 19. 14:16

 

 

권기수_Would you wait for-Gree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09

● 동글동글한 인생을 꿈꾸며......

 

동구리가 돌아왔다. 동글동글, 귀여운 미술 속 아이콘 '동구리'. 작가 권기수의 그림을 알게 된 건, 꽤나 오래전이다. 그가 신인으로 동구리를 시장에 선보이던 시절, 밝고 환한 색감의 만화적인 도상이 조밀하게 자리한 한편의 그림은 동화 일러스트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코리안팝 아트의 새로운 흐름과 더불어 동구리는 많은 상품화 전략과 맞물려,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포츠관련 용품 및 패션제품을 파는 레노마와의 패션 플러스 콜래보레이션 작업도 볼만했고, 이후에도 다양한 예술과 패션의 협업작업에, 동구리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현대 미술작가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아이콘 작업에 몰입하게 된 경향의 배후엔, 동구리가 있었다.

권기수_On the rainbow - red ri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10

● 사과를 깍다가......

 

동구리는 동양적 관점의 현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자연 속을 유유히 거니는, 멋진 말로 '소요유'라 불리는 정신적 행위를 즐기는 현자다. 작품에 쓰이는 재료는 아크릴 물감을 이용한 탓에, 밝고 환한 기운이 가득하지만, 자세히 그림 속 배경을 살펴보면, 동양적 소재인 오방색과 대나무 숲, 매화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작가 또한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던 걸로 알고 있다. 이후 그의 그림은 가벼워졌다. 그림이라기 보다, 팬시용품점 노트 표지에나 오를 상품의 아이콘을 만들었고, 인터넷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유포시켰다. 코리안 팝아트에 대한 비난 또한 존재하지만, 그 배후에는 여전히 무겁고 중압감 넘치는 한국화단에 대한 비판, 대중문화와 고급예술의 영역을 교차하며 경계를 허무는 유쾌함이 존재한다.

권기수_Green forest with cub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권기수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꼭 사과가 먹고 싶다. 왜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며칠 전 독자분이 익명으로 잘 읽은 충북사과를 보내주셨다. 탐스럽게 익은 발그레한 사과껍질을 벗기고 있자니, 달콤한 수액을 머금은 연한 황색 속살이 드러난다. 과육을 벗긴다. 껍질은 칼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비틀며 떨어지고 내 안에는 동그랗게 발려진 사과가 들려있다. 사과를 깍을  때마다 내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 속살의 빛깔을 보기 위해, 나는 얼마나 내 표피를 벗겨냈고, 나를 둘러싼 사회적 의상을 벗었는지를. 마치 습관성 집착처럼, 누군가의 속살을 벗기고, 그의 폐부를 보려는 욕망만 강했지, 내 안에 있는 언어의 씨앗은 벗겨보지 못했다.

권기수_Study of Towoo-sil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0

동구리를 볼때마다 항상 궁금했었다. 왜 동구리는 항상 네모난 큐브 위에 서 있거나, 혹은 앉아있거나, 누워있을까? 그리고 저 각진 큐브는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작가는 말했다. '각진 큐브는 서로에게 차단된 사회 속 우리들의 모습이자 사회적 질서임을"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그랬고, 담론이 그랬으며, 정치적 패권과 경제적 능력 모두가 결국, 서로를 차단시키는 투명한 벽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양의 현자들은 이런 삶의 매트릭스를 비난해왔다. 그 위로 우화등선하듯, 소요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군자이자 성인이라고 했다.

 

권기수_Sky Blue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권기수는 동구리와 더불어, 항상 동양화의 매란국죽이란 사군자 도상을 이용한다. 극단적인 단순화 작업을 통해 매화와 난, 국화와 대나무는 일종의 기호처럼 축약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림 속 긴 막대모양은 바로 대나무다. 멋진건 그 대나무의 결 마디 하나하나가 오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신적 지조와 선비정신이란 단어가 그저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구닥다리 개념 취급을 받는 요즘이다. 하지만 세상사를 되돌아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이것 저것 기웃거리는 자들보다, 더 깊은 생의 우물을 파는 경우가 많다. 권기수의 <투우에 대한 연구>란 그림을 보면 마치 금강경에 나오는 '소를 타는 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권기수_Time-white river with a ship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10

현자는 항상 배를 타고 기억의 강을 건넌다. 매화와 대나무가 흐드러지게 방창하는 그 세계 속을 자유롭게 거닌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진 자만이,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벗고 각진 큐브의 표면 위로 올라와 햇살 마루에서 달콤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법이다.

 

권기수_Red Tab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227cm_2008~10

● 무상급식에 관한 생각들-동구리가 생각나는 이유

 

요즘 정치권의 때 아닌 화두는 '무상급식'이다. 여당은 무상급식을 가리켜 공산주의적 발상이라고 말했다지만, 정작 경기도 하나만 보더라도 94퍼센트가 찬성을 던진 정책적 방향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인다는 것은, 단순하게 한끼의 허기를 사회가 책임져준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밥상 공동체란 단어가 희미해져 가는 사회. 강렬한 이전투구로 사회적 결속이 무너지는 사회다. 영어의 Companion이란 단어가 있다. 동료란 뜻이다. 중세에는 이 말은 함께 같은 빵을 뜯어먹는 사람이란 이었단다. 이때는 단단하게 구운 빵 안에 수프를 끓여 넣어주었다. 마땅한 그릇이 없었기에 그랬다지만,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을 것이며 함게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을 터다. 사회가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밥 한끼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너져가는 공동체 의식의 회복이다. 급식의 유무를 놓고 계급적 차별을 드러내기에 바쁜, 못난 어른들에게, 봄날의 따스한 찬과 물과 한끼의 밥이 필요한 이유다. 따스함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테이블을 아이들에게 주자.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 동구리에게 배우는 생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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