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패션, 칼춤을 추다-21세기 패션에 나타난 퇴폐와 죽음

패션 큐레이터 2009. 11. 25. 01:27

 

 S#1 칼날 위에 선 패션

 

모처럼 만에 큐레이터의 서재 폴더에 글을 채웁니다. 이 폴더를 만들면서 패션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과 논문을 정리해서 올리고 싶었는데요.

 

제 서재에 빼곡히 꽂혀있는 패션이론과 복식사, 패션미학 관련 서적을 하나씩 정리해서 올리기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큐레이터의 서재라고 한 이상, 책을 단순하게 읽는 작업은 별로 도움이 되질 않지요. 항상 그랬던것 같습니다. 제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구성하고 있는 생각의 얼개들, 그 바탕이 되는 다른 저자들의 텍스트들을 함께 읽고 나서야, 한권의 책을 마무리 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번에 소개하는 Fashion at the Edge는 주목해볼만한 패션이론책입니다. 저자인 캐롤린 에반스는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쓰면서 복식사와 패션평론 부분의 책을 읽으며 잘 알게되었는데요. 한국은 제대로 패션평론을 하는 분도 없을뿐더러, 사회학과 정치학, 인류학, 문화이론, 미학과 예술론을 통합해서 통합적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기초로서 패션을 읽어내는 학자가 아주 드뭅니다.

 

사실은 거의 없죠. 물론 학자들이야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한국에서 패션 관련된 학회나 논문지들을 살펴보면, 그 깊이가 매우 일천합니다. 최근엔 패션 마케팅과 교수님이 쓴 책을 읽었는데, 수업자료들을 짜깁어서 만든 책이었네요. 럭셔리 브랜드에 대한 다양한 깊이있는 분석보단, 경영학의 피상적인 개념 몇개를 빌려다가 4P(Product Place Promotion Price)를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물론 패션경영에 관한 책이긴 합니다만, 패션이론과 다양한 인문학적 해석이 없다보니 책이 깊이를 담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죠.

 

 

서구의 최근 동향을 보면, 경영학도 범죄학 분야의 프로파일링 기법과 인류학의 현장조사법, 문화이론의 틀 속에서 다양한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경영담론들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깊어지고 있고 통섭의 관점들이 주무대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죠. 사실 Fashion at the Edge도 그렇게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 다만 패션미학과 철학 분야에선 최근의 경향들을 정리해 담아놓았다는 점이 좋죠.

 

 

최근의 실험적인 패션은 어두운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과 트라우마, 소외와 퇴폐, 몰락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사회심리적 정황들을 나름대로 패션작품을 통해 해석한점이 눈에 띕니다. 1990년대 패션 디자인의 한 경향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소비문화와 불안한 현대문명의 테마와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불편한 진실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인 캐롤린 에반스는 실험성이 강한 패션 디자이너들과 패션사진가들의 작품을 비교 분석하면서 90년대 최정점에 도달했던 패션쇼의 연희적 성격들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선 존 갈리아노와 알렉산더 맥퀸, 후세인 샬라얀, 빅터 앤 롤프 등과 같은 실험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그 속에 드러난 어둠의 테마와 패션의 경향을 소개합니다.

 

 

저는 패션이론과 복식사를 연구하면서, 미술사의 접근방법에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패션이란 것이 하나의 스펙터클, 눈요기감으로서, 시각문화의 일종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 시각문화의 저변과 맥락을 이해하고 풍성한 해석을 해보려면 결국 협소한 기존의 복식사적 시각보다는, 미술과 디자인, 소비문화를 관통하는 현대미술담론을 살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되었죠. 이 책은 이런 우려를 불식할 수 있을만큼 풍성한 복식이론과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패션보다 근대성을 더욱 날카롭게 성찰할 수 있는 이론적 체계가 있을까요? 캐롤린 에반스는 12가지 근대성의 풍경이란 글에서 현대패션이 예전 바로크 시대의 미학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부분 동의하지요. 지나친 풍성함, 과장이 흘러넘치는 사회에 대한 반영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에로틱한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매체와 미디어, 그 속에서의 디자이너의 작업은 예정 궁정에서 패션을 통해, 마치 무대위의 배우처럼 활동했던 루이 14세를 연상시킵니다.

 

 

학부생이 읽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겁니다. 책의 얼개와 내용을 살펴보니 광범위한 독서를 한 의상학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대조시킨 이미지들만 살펴봐도 좋구요. 뒤에 참고서적들을 보니 대부분 미학과 사회학, 문화이론 등의 고전들이 많이 원용되었더군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1500페이지가 넘는 장서인데, 저도 몇번이나 읽다가 중단을 했었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 참고로 읽어보셨으면 하는 책이 있는데요. 아직 번역이 안되었습니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가면의 길>이란 책이에요. 관심이 있는 큐레이터나 이론 분과의 학생들은 찾아서 일독해보면 도움이 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