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사를 연구하다보면, 지난 세월의 책들을
살펴보다가 의외로 좋은 자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복식사가인 캐럴린 에반스와 크리스토퍼 브루어드가 펴낸 <London Look>
이 바로 그런 책 중에 하나다. 하는 항상 패션을 통해 국가와
문화적 정체성을 함께 읽어내는 작업을 한다.
향후 목표는 라틴미술과 문화를 패션을 통해 읽어내는 것이고
물론 계약된 단행본으로 낼 생각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패션을 인문사회학의
지식을 통섭하는 열쇠말로 사용하려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것 같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
를 쓰면서 파리를 수십차례 다녔지만 충분치 않았다. 도대체가 복식사란 분야는
나 같은 비전공자가 뭔가 열의에 차서 하나를 건들면 한도끝도 없이
실타래가 풀려나오는 논리의 연장선만 보이는 세상이었다.
하긴 한국사회에서 이런 연구작업 자체를 하는 학자가 없다는 건
아쉽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다. 복식문화니 복식사니 연구해서 먹고 살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이 따르지 못하니, 나 같은 인디 스칼러들이 뛰어다니는 수 밖에
단 나도 본업을 버리고선 절대로 일할 수 없다. 사들여야 하는 자료의 값이
만만치 않다는 수준을 넘어, 집 한채 값이 되어가니 어쩔땐 약간
내 안에 있는 자료 편집증에 제동을 걸고 싶기도 하다.
패션은 시대정신의 정수를 담은 그릇이다. 옷 한벌, 천 한장에는
옷을 잉태한 사회의 면면이 씨실과 날실로 엮어져 나온다. 유럽의 고아한 패션을
맛보고, 나아가 한국패션의 세계적 브랜드화를 이루려면 역사연구에 대한 선행작업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 몇군데 국공립 단체의 패션관련 자문위원 업무를 제의받곤 한다.
하지만 고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건이 땅에서 자문위원이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공무원들이 세워놓은 계획을 자신의 명예를 이용해 그들의 계획을 인증해 주는
그냥 도장 찍어주는 사람이란 생각밖엔 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말이 길었다. 오늘 소개할 책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영국패션의 역사에는 런던이란 도시의 발달과 과정이 배어나온다. 이 두가지 요소의
결합을 통한 사유가 없이 패션의 '영국성'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이탈리아 패션의 '이탈리아성'을
깨닫기 위해 피렌체와 밀라노란 도시의 성장을, 미술사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London Look>의
부제는 '거리에서 캣워크까지'다. 말 그대로 영국 패션의 발원과 현대영국패션의 특성까지 역사적
관점을 통해 일이관지한다. '세빌로에서 카나비 거리까지, 영국 패션의 발원을 살펴보고
19세기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입고 다닌 보헤미안 드레스와 최근의 펑크패션까지
런던은 패션 스타일의 주요하나 원천이었다. 영국패션의 200년 역사를
통해 '패션의 영국성'을 살펴보는 세 학자의 시선이 올곧다.
200년 동안 런던 패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디자인과 생산, 마케팅, 옷의 소비에 초점을 맞추며 저자들은
사회문화적/도시내의 경제적 변화란 맥락 속에 이러한 행위들을 위치시킨 후
면밀하게 살핀다. <웨스트엔드>지역의 발흥이 제국주의 시대 패션의 중심지로서 성장하게 된
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의복의 민주화와 모더니티의 감성이 어떻게
혼융되는지, 여기에 대해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통해 살펴본다.
여성을 가장 패션을 통해 옥죄었던 빅토리아 시대에서
그 속에서도 여성의 인권과 위생, 복리를 위해 싸웠던 '복식개혁운동'의
진항지도 런던이었다. 여기에 함께 동참했던 '리버티'사의 옷들이 책에 낱낱이 밝혀있다.
60년대 저항의 시대를 넘어 비틀즈와 거리의 펑크에 이르기까지
한 세대와 세대를 가로지르며, 그 시대만의 정신의 정수를 패션을 통해
읽는 학자들이 부럽다. 레퍼런스를 볼때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모으고 공부하는지
아카데미에 소속되지 않고 한 개인으로서, 인디 큐레이터로서 이 모든 작업을
하는 내가 너무 버겁다. 80년대부터 섬유대신 패션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있었을 뿐, 우리는 준비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안에 졸속처리
된 수많은 패션 행사와 디자인 행사, 전시행정의 면모들만이
가득한 이 땅의 패션담론에는 여전히 답이 안보인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우리에게 '한국성'이란 무엇이냐고
Koreaness란 말. 그러고보면 쉽게 내뱉고 비평은 수도 없이 해도
정작 그 비평을 하는 인간도 여기에 대한 답을 잘 모른다. 그냥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몇 가지 것들을 우길 뿐. 패션도 그렇다. 너무나 빨리 이뤄낸 근대화
정신의 식민지 상황이 여전히 유지되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한국'패션의 그림은 존재할까? 막막하다.
그래도 도전은 해야겠지. 아니 도전이란 표현보다
우리가 너무나도 잊고 있었던 '우리네' 옷과 정신을 찾아야 할때가
왔다. 비단 '한국복식사'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닐거다. 어차피 현대의 관점에서
조선을 비롯한 상고시대 복식을 이야기만 줄창 떠뜬다고 우리의 옷
우리의 패션이 나오는 건 아닐테니까. 결국 한 사회의 결정적
단면을 설명할 수 있는 변곡점이 되는 사회와 패션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내게 있어, 패션은 시대와 치열하게
맞닿는 접면이다. 그 곳에선 항상 뜨거운 마찰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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