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큐레이터의 서재

글래머의 역사-아이폰과 렉서스가 잘나가는 이유

패션 큐레이터 2009. 12. 12. 19:02

  

S#1 글래머-패션과 산업 디자인, 건축을 만나다

 

아마존에 신청한 10권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그 중에서 꼭 소개하고 싶었던 책이 있는데요. 바로 Glamour란 제목의 책입니다. 패션 잡지를 읽다보면 남발되는 스타일 용어들이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쉬크(Chic)와 글래머(Glamour)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 용어를 한국어로 깔끔하게 번역해내지 못하는 상황이 매우 불쾌합니다.

 

에디터들에게 서구 일변도의 패션용어를 한국화하는 작업에 나서달라고 할 때마다, 자주 듣는 이야기가 '용어를 번역할 경우 원래 단어의 느낌이 떨어지게 된다' 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번역이란 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고 언어를 잉태한 사회의 전체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적확한 번역을 할수 있는 건 사실이죠.

 

그러나 이런 담론의 배후엔 철저하게 서구가 규정한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식민주의적 사고가 있습니다. 패션에도 탈식민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옷이란 오브제 뿐만 아니라, 옷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담론의 체계에도 이런 탈식민의 바람이 불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Glamour : Fashion, Industrial Design, Architecture>은 상당히 매력있는 책입니다. 패션과 산업디자인, 건축이란 세가지 분과에서 말하는 글래머의 의미를 밝힙니다. 용어상의 혼선을 피하고 어떻게 서로의 상상력을 훔쳐볼 수 있을지 타진해 보는 노력은 상당합니다. 원래 2005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도록인데, 꽤 시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통찰력이 엿보입니다.

   

S#2 도대체 글래머가 뭐길래

글래머의 원어는 글라므입니다. 고대 아이슬랜드 어인데, 달빛의 아련한 매력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영화 <뉴문>이나 <트와일라잇>과 같이 달에 대한 상상력이 녹아나는 작품이 인기인데요. 글래머란 용어는 바로 이 달빛과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슬랜드 신화에서 달은 '글라므'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스코틀랜드의 게일어에 합류되어 글램(Glam)이 되었죠.

 

흔히 글램룩이라 부르는 말의 어원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달빛 속에서 노는 엘프(요정)의 하나인 이 글램은 사람들에게 사물을 실제와 다른 식으로 보게 하는' 능력을 제공했다지요. 바로 여기서 영어의 글래머가 탄생합니다. 매력이 풍부한 신비한 아름다움이란 뜻의 글래머는 풍만한 육체를 가진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글래머의 의미는 초기 어원에서 볼수 있듯, 처연한 달빛 아래 놓인 사물들의 표면, 그것이 잉태하는 독특한 느낌을 뜻하지요. 스타일 용어로서의 글래머는 매력적이지만 포착하기 어려운 현대적 용어로 남게 됩니다. 이 책 <글래머>는 바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글래머의 실체를 밝힙니다.

 

 

19세기 패션의 역사에서 글래머의 역사는 현대의 풍요와 우아함을 포용하는 개념으로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글래머란 풍성한 장식패턴과 복합적인 화려한 의류소재 및 조각과 같은 패션을 의미하는 말로 변모하죠. 즉 디자인의 비평적인 범주로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1920년대 헐리우드의 황금시기를 넘어 현대 패션의 거장들, 샤넬과 디오르, 구찌, 베르사체에 이르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통해 글래머의 실체를 설명하는 부분은 눈이 부실 정도네요. 이외에도 건축 분야의 설명은 더욱 흥미 진진합니다.

 

이번 겨울 한예종 강의를 준비하면서 구매한 책인데, 열심히 읽고 생각을 정리하려 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큰 단점 중에 하나가, 급속한 서구화의 속도에 눌려 스타일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비(非) 미학적 사회가 되었다는 점을 항상 지적해왔습니다. 스타일이 없다는 것은 역사를 녹여내지 않았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부산물엔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뜻과 연결됩니다.

 

최근 세계적인 마케팅의 거장인 잭 트라우트가 삼성과 현대그룹에 대해 일침을 놓았더군요. 국가 브랜딩과 더불어 재포지셔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국내 아이폰 열풍과 관련해 "애플 숍은 누구든지 다시 가보고 싶어하는 멋진 장소다. 아이폰을 꺼내 쓰면 옆에 있는 사람 누구나 힐끔거린다"며 "애플은 제품에 스토리를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합니다.

 

저는 그의 평가에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 수준을 넘어선 컴퓨터 폰"이라며 "아이폰은 참신하고 삼성 휴대전화는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다고 질타합니다. 스토리노믹스(storynomics)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제품엔 그 어디에도 이미지 내의 이야기가 부재합니다.

 

이야기가 부재하기에 제품 속에 '글래머'한 매력을 삽입해내지 못합니다. 글래머의 어원이 '사물을 원래의 것과 다르게 보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씀드렸죠? 그건 제품 그 자체가 품는 아우라를 의미합니다. 아이폰과 렉서스가 잘 나가는 건, 단순하게 미국과 일본이란 국가브랜드 가치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의 이미지 차별화 전략을 살펴보면, 결국 시각이 아닌, 청각, 이야기를 듣는 청자를 바탕으로 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는 빨리 이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이야기 능력입니다.

 

마케터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온고지신의 지혜를 이야기로 풀어오지 못한 우리의 불행한 근대사와 맞물리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이제는 3만불을 향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복원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이고, 그것을 제품과 결합하는 시도입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개념상의 진화를 어떻게 포착하는지 좋은 방법론을 제공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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