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구 텍스타일 아트 도큐멘타전에 다녀왔습니다. 독일의 카셀에서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에 작년 한해만 빼놓고선 항상 갔었습니다, 현대미술의 최첨단을 다루며 미의식의 프론티어를 보여주는 도큐멘타는 시대의 모든 미감은 기록되어야 한다는 정신 아래, 벌어지는 일종의 목록화 작업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독일의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더불어 유럽의 3대 미술 페어지요.
한국에서도 이런 도큐멘타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미술과 패션의 접점, 그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술적 창의성과 긴장감을 끌어내는 전시를 만들었습니다.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섬유의 도시 70년대 텍스타일의 고장이라 불렸던 대구답게, 현대의 텍스타일을 이용한 섬유미술과 패션 디자인의 만남을 주제로 <텍스타일 아트 도큐멘타>를 열었습니다.
연혁이 짧은 탓인지, 큐레이터의 인식 부족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족한 점은 곳곳에 산재해 보입니다. 전시 디스플레이에서 부터 홍보방식까지여전히 서울중심으로 열리는 페어시장에서, 지방에서 기치를 들고 뭔가를 저지르는 것이 쉽지 않지만, 섬유란 특화된 하부구조를 튼튼하게 유지하려는 대구란 도시의 특성을 고려해볼때, 이러한 섬유 중심의 도큐멘타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국제마케터로 살아오면서 다양한 종류의 전시장을 다녔습니다. 섬유와 패션 전자장비와 소비가전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세계의 주요한 페어들이 꼭 한국처럼 서울이란 중심부에서만 열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서 열리는 소비가전 쇼에도 유명한 바이어들이 운집하고 엄청난 양의 거래가 일어나더라구요. 페어준비를 작은 지역 전체가 함께 하고 손님을 맞고 이윤을 올립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전시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져야 겠지만, 경쟁력을 가진 부분을 극대화 하여, 자신의 고장을 브랜드화 해야합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다양한 페어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건, 하나같이 관치에 의한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죠. 공무원들에겐 미안하지만 도대체가 머리가 있는 것인지, 천편일률적인 프로그램으로 가득찬, 특화된 내용이 없는 페스티벌과 페어가 태반입니다. 세계적인 경영전략가인 마이클 포터는 국가 경쟁력의 기초로 '클러스터'화를 주장합니다. 말 그대로 경쟁력있는 산업의 요소를 묶어서 덩어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업 경쟁우위의 많은 부분이 기업의 ‘외부’에 달려 있으며 지리적 위치와 산업 클러스터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클러스터의 형성은 중요합니다.
최연옥, 세컨드 사이클, 메탈릭한 poly 소재와 100데니아 샤 원단 外, 2009
이번 대구텍스타일 아트도큐멘타는 멋진 포스터와 전시제목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의 시선을 끌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예산상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아직 초기다 보니 기획상의 미비한 점들이 많겠지요.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고 채워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위의 사진 작품은 레베카 최연옥의 Second Cycle이란 작품입니다. 친환경 패션 산업 체계를 위해 무엇보다 현대 섬유산업의 원형들이 바뀌어야 하기에, 이런 인식을 다루는 작품들이 나오는 것 같네요.
박동준, Vincent Van Gogh의 꽃과 정물, 100% 실크, 폴리에스테르, 2008
이번 대구텍스타일아트 도큐멘타는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주제는 페브릭 아르케(Fabric Arche)입니다. 아르케란 라틴어로 원형, 질료의 원본을 의미하지요. 옷이라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 원형으로서의 직물(패브릭)을 사유하자는 의도로 보입니다. '숨쉬는 결''도전하는 패션''빛과 색'을 하위테마로 삼아 작가들의 작품을 선정 전시를 했습니다. 위의 작품은 디자이너 박동준의 작품이구요. 빈센트 반 고호의 작품 속 꽃과 정물의 이미지를 프린팅해서 강렬한 색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작가 진성모는 합성고무의 일종인 네오프렌을 이용해 면을 코팅한 철제 구조물 위에 옷을 입히고 비대칭 구조로 서 있는 옷의 면모를 살펴봅니다. 마치 세월의 겹 위에서 풍화된 옷의 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조덕현, 노라 콜렉션, 설치, 캔버스에 연필과 콘테, 2008
조덕현은 항상 가족사에 관심을 갖던 작가였습니다. 그의 사진 연작은 가족 사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워지는 구성원들의 아련한 모습을 담곤 했죠. 이번엔 이 흐름이 직물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캔버스 속 직물의 모습과 실제 직물이 연결되어 기억과 현실의 '연결'이란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안성금, 부처의 소리95-96, 캔버스에 불경을 세리그래프, FRP, 1995-1996
테마와 굳이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도 종종 보입니다. 텍스타일 도큐멘타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1부의 테마로 삼았던 <숨쉬는 결> 부부분을 강화했어야 하지 않나 싶거든요. 텍스타일의 원형과 본질에 대해 고민하겠다고 해놓고선, 정작 가보면 엉뚱한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는 걸 꽤 많이 봅니다. 그만큼 섬유 자체의 물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면밀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죠.
정경연, 무제 81-6 55x240cm, 면장갑에 염색, 1981
장갑이란 모티브로 손의 확장이란 주제를 일관되게 보여준 작가 정경연의 작품입니다. 면장갑에 작가가 침염을 한 후 서로 깍지를 끼듯 엉켜놓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체부위와 맞닿은 패션의 오브제들은 각각의 신체부위가 주로 활용되는 사회적 영역과 활동의 이미지를 은유하게 됩니다.
정경연, 블랙홀09-02, 캔버스에 혼합매체, 181.8X227.4cm,2009
정경연은 침염한 원단을 이어붙여 블랙홀의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불교적 연기설에 관심을 갖고 이 작업 시리즈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손과 손이 맞닿은 세상, 관계의 끈으로 엮여 있는 우주에 대한 상징을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부족한 일면은 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이 도큐멘타를 유지시켜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대구와 텍스타일은 참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비록 근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어두운 측면도 있겠지만, 패션산업이 꽃을 피기 위해선, 염색을 비롯한 텍스타일 문화가 지금보다 더욱 관심을 받아야 합니다. 세계의 패션강국들은 첨단나노와 화학기술을 이용해 텍스타일의 물성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자연염색을 생산공정과 연결시키는 작업도 꾸준히 연구중이지요.
이번 도큐멘타전은 전시도 나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세계적인 자연염색 전문가인 카렌 어바넥 교수의 특강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연사 포럼 내용을 자료화해서 단행본으로 판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외에도 전남대 신윤숙 교수의 한국의 전통 니남법을 바탕으로 한 천연 인디고의 생산과정 공정화 방안과 같은 발표는 고무적이었습니다. 저는 아트페어에 가면 꼭 도록과 자료집을 철저하게 챙기는데, 이번 텍스타일 아트 도큐멘타는 서울에 있는 학자들이나 관심있는 분들이 도록을 구매하거나 자료집을 얻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더군요. 패션협회에 전화해서 입금 후에 받기로 했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바로 티가 되는 거죠. 특히 포럼 내용은 비디오로 촬영해서 자막을 입힌 후 자료로 만들어 패션 관련 연구단체나 대학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정보가 구축되고 쌓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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