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특강을 마치고 국립광주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2009년 천연염색 페스티벌이 열렸는데요.
그라시아님도 이곳에 강사로 계셨습니다. 오늘 본 염색은 적색계열의 천연염색
인 락(lak)과 소목을 이용한 염색입니다. 저는 직물이 좋습니다. 씨실과
날실로 교직하며 우리의 꿈을 안아주는 저 천의 세계.
그 속에 자연의 속살이 부끄러워 물이 들때쯤
그 빛깔에 우리를 비춰보고, 지금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죠. '너 지금 행복하니?"라고요.
염색 후 털어내는 사람들의 표정도 너무나 밝기만 하네요.
이번 적색계열 염색은 소재에 대한 소개만 하겠습니다. 사실 염색과정은
거의 소재별로 차이가 없어서요. 제가 나주에 간 첫날, 그라시아님께 단계별로
꼼꼼하게 쪽염색을 배웠습니다. 그 과정을 스텝 바이 스텝으로 찍었으니까 다음편에
매뉴얼처럼 올려드릴게요. 오늘 보여드리는 적색계열 염색 소재는 바로 락과 소목이란 것입니다.
우선 적색을 얻기 위해, 오래전부터 인도와 중국 등
아열대 기후를 가진 나라에서는 락이란 벌레를 이용했습니다.
락은 인도와 태국, 네팔 등지의 몰약나무에서 기생하는 벌레입니다.
전 세계에 1만 여종이 있는데, 운동기능을 잃은 암컷이 식물에 기생하며
단백질 성분을 분비한 후 이것으로 자신의 몸을 덮는데요. 이 분비물로 덮혀있는
락충은 적색 색소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채집하여 붉은 색 염료로 사용해 왔습니다.
또 다른 적색계열 염색에 사용되는 소목은
브라질레인이라는 색소 성분을 가진 다색성 매염염료입니다.
매염이란 쉽게 말해 집에서 도배를 할때, 벽이 섬유이고 벽지가 염료라고 할때
이를 벽에 붙이는 풀이 곧 매염제입니다. 매염이란 이 매염제를 이용하여
섬유에 염료가 견고하게 안착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소목은 철을 매염제로 쓰면 자색이 되지만
그 색이 지초에 미치지 못하므로 조선시대에는 홍색염색에
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소목은 비단이나 종이를 염색합니다.
꾸욱 짜내면 쏟아지는 저 적빛 물이
땅과 인간의 손과 마음을 물들입니다. 제게도 정열의
힘이 영혼의 직물위에 잘 안착했으면 좋겠습니다.
햇살에 투과된 소목염색천의 빛깔이
무르익은 살구빛을 띄네요. 염색이 끝난 후 빨랫줄에
널어 말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습니다. 염색이 비단
직물 위에 빛깔을 입힌 것이 아닌가봅니다. 자연의 소리와 속살을 내 안에
껴안고 그 빛이 차 오르도록 기다리며 물들이는 그 시간.
그 물에 손을 담근 사람들도 행복합니다.
사람들의 표정 속, 인생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그 속에서 자족하고 환하게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날 강의를 해주신 김왕식 전남천연염색협회 사무국장님께
염색 후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나도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염색이 가진 철학적 의미들을 곱씹어
볼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천연염색 바람이 불고, 산업화를 고민하는
단계가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염색이란 과정을 단순하게 친환경
슬로우 라이프 정도를 상징하는 매개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염색은 결국 자기성찰의 과정이고, 자신의 현재수준에 맞는 색이
발현되는 과정이란 점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현재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빛깔이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것을 발색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인간에게는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고, 나를 더 드러내고 싶은 사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바람의 소리가 들리세요?
사각사각 천들이 저 바람의 정자와 교열하는 환희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손으로 만질 수 없어서 볼 수 없어서
그 실체를 알수 없던 바람은 붉게 물든 자연의 피륙 위에 자신의
씨앗을 뿌립니다.
색을 낸다는 것은, 색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나를 알고 성찰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결국 발색이란, 내 자신에 대한 성찰,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어디에서 쉼의 여백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완성되는 과정인 것이었습니다.
핑크빛 물이 얼굴에 들었습니다.
코발트 블루빛 하늘과 미만한 분홍빛 소목 염색천
아래 얼굴을 묻습니다. 직물에 얼굴이 가린터라 투과되는 햇살이
암영을 그리지만, 그 조차도 분홍으로 물들어 버리는 군요.
그라시아 선생님도 환하게 웃고 계시고
저도 살포시 웃습니다. 예전 영화 <은행나무침대>를 보면서
염색된 천들 사이로 환하게 웃던 여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네요.
직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듯요. 염색은
알면 알수록 자연에게 가까이 가야만 합니다. 천연염색에
관한 글을 왜 이제서야 올렸을까요? 제가 살고 있는 서울에도 인사동만
가면 염색과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쪽빛 하늘을 닮은 나주의 하늘 아래
물들인 직물의 빛이 자연을 그 속에 잉태하듯, 오늘 본 락과 소목의
핑크빛도 더욱 선연한게 아닐까요?
염색천을 말리는 빨랫줄 옆에 가지런히
가을의 기운 속에 속살이 차오르는 모과의 향이 전해집니다.
빛깔이며 모양이며 울퉁불퉁 제 멋대로 생긴것이 모과인 줄 알았는데
미만한 연두빛의 모과란 이런 것이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죠.
가을미풍과 햇살이 조금씩 사그러들며 한 웅큼씩
가슴살을 떼 쓴 저 초록빛 혈서의 속살엔 오늘 물들인 적물이
쭈욱 짜며 흘러나올것만 같습니다. 목면에 물들여 자연스레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휘발해가는 저 적요한 직물의 외침이, 사진에 담는
제 귓가에 자그마하게 들리기 시작하네요.
비밀스럽게 안으로만 부는 바람은 여인의 속살을 애무하며
지나갑니다. 불어에서 꽃과 애무의 어원이 동일한 것은, 아마도 그 꽃의
여린 입술에 머물다 살포시 껴안고 가는 바람의 움직임을 그린 것일 겁니다.
그 움직임속에 녹아있는 바람의 소리가 들립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즐긴 하루의 염색체험이지만
돌아갈 시간이 되자 마음 한구석이 환하게 분홍으로 차오르네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셨던 선생님과 체험하시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만끽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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