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희_눈부신 오후_캔버스에 염료, 면사, 밀가루 풀_67×98cm_2009
지난 토요일, 인사동 거리를 걸었습니다.
달보드레하게 차오르는 추일서정을 떠올르게 하는
거리의 풍경은 적당한 햇살과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모처럼만에
실을 소재로 하는 전시가 열린다길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홍진희_미치고 싶을 때_한지에 채색. 면사, 밀가루 풀_65.1×90.9cm_2009
저는 개인적으로 직물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그것을 엮고 짜는 실의 역사,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도
틈틈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직물의 역사>를 다시 읽으며 피륙 한장에
담긴 시대정신과 마음의 풍경을 가늠해 보는 일은 도전적이면서도 흥미롭기만 합니다.
유화나 아크릴 물감소재와 어울리는 캔버스에 실을 붙여 작업한 홍진희의 작품
은 그런 점에서 놀랍습니다. 실이 가진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오랜 시간동안 캔버스에 풀을 먹여 붙여내는 고된 작업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홍진희_when I missed green..._한지에 채색, 면사, 밀가루 풀_60×48cm_2009
실은 물리적 재료를 떠나, 삶과 지식의 체계에서
유용한 은유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과학에서는 초끈이론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탄생이 마치 하나의 강력한 끈들의 엮임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성경 속 솔로몬도 자신의 탄생을 가리켜
어미의 자궁속에서 나를 조직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조직이란
표현을 영어로 찾아보면 Knit me Together 입니다.
실처럼 영혼의 기운이 가득한 생명의
끈으로 나를 한장의 피륙을 짜듯 엮고 영글어 가는 것.
그것을 생의 조직이라고 했고, 생명의 조형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실은 생명이란 거룩한 힘의 성소입니다.
홍진희_아름다운 시절_한지에 채색, 면사, 밀가루 풀_65.1×90.9cm_2009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때론 부드럽고 때론
거친 질감과 미세한 양감의 매력, 또한 섬세한 손끝 조작으로 무수한
형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어 실이라는 오브제를 고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작업이 힘들면 힘들수록 마음을 비울 수 있어 좋아요."
작가는 실이 좋아서 자신의 작품에 오브제로 실을 사용한
까닭에 대해서 위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미적인 발언입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실을 사용할 때 기존의 캔버스가 가질수 없는 더욱 강력한
존재론적 면모를 갖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의 실은 한명의 인간입니다.
그 실에 또 하나의 실이 보태어지고 또 다른 실이 덧붙여집니다. 처음에는
한없이 연약해보이는 실도 꼬임을 통해 강해집니다.
홍진희_여름, 그속에서_캔버스에 염료, 면사, 은사, 밀가루 풀_92×143cm_2009
홍진희의 작업에서 숲과 나무가 나오는 것은
그것이 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생의 작은 지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정치적 환멸과 경제적 두려움이 일상의 배면을
꿰뚫는 시대, 상처의 풍경을 견뎌내는 힘은 결국 연대입니다. 아직은 힘이 남아있는
내가 나보다 약자인 자를 위해 손을 내밀고 돌보는 일입니다. 이 돌봄의 미학
이 깨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입니다. 나만 살아내면
되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숲에는 상처만 가득합니다.
홍진희_겨울숲_실크에 나염, 프린트, 면사, 밀가루 풀_76×114cm_2009
숲의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나무들의 섭생에는
연합하여 선을 이루며, 돌봄과 보살핌을 내재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실제로는 두겹, 세겹의
실이 꼬여있습니다. 강연사라고 하지요. 우리가 옷을 만들고 이불을 만들때
사용하는 실들은 다 이렇게 세겹이상이 꼬임을 통해 강건함을 갖게 됩니다. 초록빛 겨울
숲의 섭생을 하얀눈이 내려 더욱 그 프로필선을 뚜렷하게 드러내듯, 인간의 만남도
돌봄도 연대를 통해서 강건해지며 그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홍진희_작은숲(입체작)_나무에 실_25×35×18cm_2009
실의 엮임을 통해, 생의 탄생을 조형하듯
피륙처럼 짜인 인간들이 모인 저 숲은 높은 도덕성을
통해서만 유지됩니다.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실망을 금치 못합니다.
한국 최고의 대학 총장이었다는 분은 천만원을 소액의 용돈으로 표현했고,
일반인의 경우 구속이 가능한 위장전입과 탈세도 그저 유감의 수준과 사과표명으로
정리되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홍진희 작가가 작업한 저 숲 속의 나무들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지켜야 할 법을 철저하게 감내하는데, 정작 그 숲에서
정신성을 배우자며 갖은 감언이설과 명문을 써대는 이 땅의 지식인들이
수사학의 대상으로서만 숲을 사랑하는 것, 실의 존재론을 믿는
일은 슬픈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할 일이죠.
홍진희의 작업을 보면서 저 거룩한 생의 성소앞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갈 시간을 기다려봅니다. 비록 작은 생이나마,
유약하지 않게 쉽게 끊어지지 않으며, 상처를 내기보단, 아픔을 기우는
실의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간다면 더 나은 세상이 오겠지요?
요시마타 료가 작곡한 드라마 삽입곡을 올립니다.
제목이 참 좋습니다. '힘 좀 냅시다'네요.
<패브릭 스토리> 폴더는 섬유미술에 대한 내용과 더불어
직물의 뒷 이야기을 재미있게 풀어가려고 합니다. 면의 역사,
실크의 문화사 등 직물 한장에 담긴 우리들의 삶을 찾아서 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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