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패션, 윤리학에 말을 건내다
경기도 미술관에서 보낸 도록을 받았습니다. 최근 진행중인 크로스 장르展 <패션의 윤리학, 착하게 입자>의 전시카탈로그였지요. 저 또한 도록에 실릴 글을 한편 썼습니다. <패션, 시대를 투영하는 프리즘>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황록주 큐레이터께서 이번 전시의 의의를, 디자이너 오르솔라 드 캐스트로는 창조적 디자인을 통해 환경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패션 산업의 재활용과 재생문제를 심층깊게 다루었습니다. 패션의 윤리학에 대한 간단한 소고와 함께 제 글이 실렸는데요.
패션이란 사회적 담론을 지탱하고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글의 주요 내용입니다. 패션을 다루는 매개로서의 미술관의 방식이라든가 지금까지의 디스플레이 방법과 테마에 대해 박물관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었죠.
이번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패션과 미술의 논의를 미학적인 측면에만 한정시켜왔다는 점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패션을 통해 다른 요소들을 결합하고 그 접합점을 찾는 인터페이스를 연구하겠다고 했지만, 사회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변혁을 꿈꿀수 있는 논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왔다는 점이죠.
그런 점에서 이번 <패션의 윤리학-착하게 입자>는 제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좋은 전시였습니다. 지속가능한 패션의 화두를 던져준 셈이고, 경영전략개념으로 익혔던 지속가능성을 윤리적 프리즘을 통해 읽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친환경이나 사회적 책임과 공정무역 패션개념을 성찰할 수 있었지요. 미술과 패션의 결합을 통한 상업화에만 관심을 쏟았전 제겐 또 다른 관심의 영역을 넓혀준 셈입니다.
패션 구매를 하면서, 평당 효율과 이익율에 목숨을 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패션은 한 순간에 매장에 들어와 사라지는 일종의 환영이었습니다.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 된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옷 이상의 것을 '구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구입하고, 짧은 라이프 사이클 속에 옷을 착용한 후, 버립니다. 심한 경우는 일주일도 입지 않고 버리는 경우도 많죠. 패션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곧 촌스러워질것이다'라고 세뇌합니다. 패션과 미디어는 소비를 부추기고,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폐기합니다.
패션의 윤리학 展은 우리의 소비행태가 전 지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며, 가격표에 나오지 않는 패션 산업의 어두운 측면, 저임금으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스웨트샵(Sweatshop)의 제품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의류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Labor Intensive Industry)입니다. 여성과 아동이 취업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죠. 산업혁명 초기의 모습 그대로 연결선상에서 봐야 합니다. 노동조건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집단적 저항이 나오게 된 것도 이때부터죠.
패션은 첨단과학과 스타일의 개념, 유행에 대한 사회성원의 인식이 경합하는 문화정치학적 지점입니다. 우산의 버팀살처럼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아우르고 사회 내부의 갈등과 수렴현상을 명징하게 보여주죠. 저는 최근 한국사회를 달구고 있는 '패션과 미술의 결합'을 예술가의 패션 디자이너化'의 현상으로 해석했습니다. 기업은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계획적 진부화를 시도합니다.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란 신상품 판매를 위해 구 상품을 계획적으로 진부한 것, 한물간 것, 꼴보기 싫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패션은 유독 이 과정이 어떤 산업보다도 강력하죠. 최근엔 전자산업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데요. 이건 무엇보다도 전자제품이 패션화의 경향을 띠게 되면서 자연스레 발생하게 된 사건이라 봐야 합니다.
저비용으로 생산된 일회용 패션상품은 소각로나 폐기처리장에서 최종 처리되며 영국에서만 매년 백만 톤이 넘는 의류가 버려집니다. 폐기 과정에서 발산되는 중금속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죠. 열악한 근무조건 속에서 시달리는 아동노동의 문제 또한 중요합니다. 문제는 패션산업으로 인해 발생되는 사회적 비용이 옷 가격표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패션의 모순입니다. 윤리적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관행 배후에 숨은 부도덕한 현실을 깨닫고 소비 행위를 반성하는 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입은 티셔츠, 니트 한벌을 위해 저가의 착취노동을 제공하며 죽어간 사람들의 눈물이 섞여 있음을 아는 일입니다. 단순히 윤리학의 문제만은 아닐것입니다.
패션의 독재아래, 가격표에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 구조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유연한 자본축적이란 미명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지 익히고, 생활 속에서 대안적 실천을 하는 것. 삶의 진정성을 옷입기란 행위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해준 경기도 미술관과 황록주 큐레이터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옷을 입는 일은 '일상의 황홀을 완성하는 예배' 입니다. 자연스레 접힌 옷 주름 하나에 우리의 삶이 배어있듯, 이 옷이 생산될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땀을 쏟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여야 합니다. 옷을 통해 말한다는 것은 그 감사를 표현하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예배에 동참해야 하는 건 필요가 아닌 의무입니다.......2009년 9월 19일 김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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