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누군가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싶을 때 보는 그림

패션 큐레이터 2009. 8. 6. 19:11

 

 

황나현_고귀하다 Nobility_한지에 혼합재료_116×91cm

 

올해 아무래도 휴가계획은 그냥 머리 속에서

정리해야 할 듯 합니다. 산재한 프로젝트와 밀린 글쓰기의 짐 앞에서

몸 구석구석이 가렵습니다. 스트레스성 피부염이라는데, 도대체가 약이 없고 그냥 쉬라고만

하지 저로서는 속이 많이 상하는 군요. 2년전만 해도 후배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여행했던 시간인데, 잔인한 도시의 습한 폭력 속에 벌거벗겨진채

비지땀만 흘리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야생 사파리를 돌면서

본 얼룩말 무리가 생각나더군요. 힘들수록 과거로 퇴행하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심리는 지나온 과거를 날카로운 더듬이로 하나하나

되집는 일로 작은 위안을 삼게 하려나 봅니다.

 

 

황나현_사랑 Love_한지에 혼합재료_90×65cm_2009

 

작가 황나현은 얼룩말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립니다.

그녀의 그림은 한 마디로 풍경화의 장르로 묶어서 설명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풍경하면 산과 물, 바람과 햇살이 어울리는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요.

게다가 동양과 서양이 규정하는 자연의 개념이 다르다 보니, 우리 동양에선

자연이란 개발이나 복종시킬 대상이 아닌, 하나가 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이상적 마음의 고향을 뜻해왔습니다.

 

 

황나현_순결 The Purity_한지에 혼합재료_45.5×38cm_2009

 

황나현의 그림 속 자연은 동양적인 자연관에

기초하여 조형된 세계입니다. 형형색색의 만발한 꽃과

얼룩말이 뒤엉켜 어느것이 배경인지, 무늬인지 알수 없는 풍경의

이중성을 그려내지요. 이국적 풍경의 열대밀림은 감각적인 생의 향연 속에

분홍빛 환상과 희망을 토해내는 자리가 됩니다.

 

 

황나현_너를만나다 Meeting You_한지에 혼합재료_53×45.5cm_2009

 

사실 그림을 보며 다소 불편한 점도 발견하게 되는건

어쩔수 없습니다. 자연합일이니, 원초적 마음의 고향으로의 회귀니 하는

수사를 사용하기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더욱 공고하고 강력해 진지 오래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본 얼룩말들의 자유로운 질주도 결국 인공적으로

조형된 사파리란 통제공간 속의 한정된 자유에 불과하지요.

그나마 이 사파리 조차도 인간의 욕망에 의해

밀렵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황나현_숨바꼭질 Hide Game_한지에 혼합재료_91×116cm_20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그림 속 얼룩말을

보며 한없은 백일몽에 빠지게 되는 건, 얼룩말이 꽃잎을

모자처럼 쓰거나, 혹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이, 마치 작가나 우리들의

초상처럼 비춰질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즉 인간의 행위를 대리하는 자연의 상징으로서

우리들의 모습을 대신 표현해준다고 해야겠지요. 저도 그림 속 얼룩말처럼

머리에 노란꽃 하나 꽂고 자연 속 일부의 빛깔이 되어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황나현_햇살_Sunlight_한지에 혼합재료_91×72cm

 

인간의 눈을 오랫동안 그려온 작가답게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얼룩말의 눈이 매우 맑고

곱습니다. 더구나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 눈을 보고 있노라니, 얼룩말의

응시하는 선하고 정직한 눈빛을 보며 도시의 습한 기운 속에

쾡해져가는 제 자신의 눈동자를 비춰보게 되네요.

 

누군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드려다 본적이

언제였나 혹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눈동자를 응시해 본적이

언제였나 생각해 봅니다. 어른 거리는 잔상은 머리 속으로 뭔가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얼룩은 얼룩말의 무늬처럼 벗겨낼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희미한 암각화처럼, 흐릿해진

내 자신에 대한 기억은 지우기란 불가합니다.

 



황나현_행복속에서 In happiness_한지에 혼합재료_116×91cm

 

어느날 문득 찌들어 흐려진

상처의 응어리를 내 눈동자에서 발견하곤

그 얼개를 읽어낼까 두려워 피하고 맙니다. 묻어 둔 울음소리가

눈동자에서 피어나고 힘들게 파묻었던 상처는 피어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맑게 닦아낸 유리창틀처럼, 투명했으면 했는데, 세상이 너무

저를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글을 쓰는 공간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 생각에 빠지고 글을 쓰는 시간이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9월부터 네이버 캐스터에서 <옷 이야기>란 테마로

8개월에 걸친 꽤나 긴 장편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스타일이나 유행분석이 아닌

복식이란 관점에서, 옷에 담긴 이야기들을 심층깊게 풀어나갈 생각이지요.

연재가 끝나는 4월 전에 단행본으로 묶어서 또한 세상에

선보이려 합니다. 요즘 일에 치여 살고 있습니다.

 

힘들기도 하고 어깨를 누르는 듯한 누군가의

손끝 악력이 너무 강력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이렇게 글을 쓰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소중한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2년전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출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출판사를

타진하고 만나고 진을 빼야 했을까요. 그때를 생각해보면

원고를 달라고 협박을 당하는 지금이 분명 행복한 건

사실이어야(?) 합니다. 물론 행복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최종 소비자들로부터의

반응이 만들어가겠지만요.

 

최선을 다해서 한걸음 한걸음씩

저 얼룩말의 숲을 걸어 나가려 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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