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책 읽기의 황홀

나는 야한 음식이 좋다-착한 밥상이야기

패션 큐레이터 2009. 5. 19. 00:21

 

 

저는 밥을 할 때가 참 즐겁습니다. 레시피를 찾아 수월수월 식재료를 사다 고물고물 요리를 만드는 시간은 행복합니다. 오늘 오전 출판사 기획자를 만나 차기 책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기네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라며 한 권을 주더군요. <착한 밥상이야기> 제목이 참 예쁩니다. 며칠 전 블로그에 <신나는 밥상>이란 카페로 글을 가져가고 싶다며 독자분이 글을 남겼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음 카페 중 하나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알고보니 오늘 받은 책의 저자가 이 카페의 주인장이더군요.

 

바로 윤혜신 씨인데요.  신학을 공부한 시인 지망생. 그녀는 밥을 지으며 사람을 구원하겠다며 <미당>이란 밥집을 세웠습니다. 저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식재료에 신경을 쓰며 고르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식재료와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 조리를 통해 빚어내는 철학이 묻어나는 글을 보면 행복합니다. 소설가 공선옥이 쓴 <행복한 만찬>도 즐겁게 읽었던 책입니다. 돈부와 머위, 부각과 다슬기탕, 씀부기를 포함한 봄나물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탁월함을 넘어 식재료가 가진 신성함을 드러내지요.

 

이번에 읽은 <착한 밥상 이야기>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내딛습니다. 궁중요리전문가로서 이 땅의 식재료를 실재로 썰고 자르고 다듬는 것이 삶을 조형하는 것임을 철학으로 내세우는 그녀. 이제 어떻게 먹는 것이 행복과 연결되는 섭생이 되는지를 설명하지요. 그녀가 설명하는 이 땅의 수많은 식재료들은 사실 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매양 하던 그대로 변주되지 않는 새로움이 없어 지겨운 일을 가리켜 <그 밥에 그 나물>이라 빈정댑니다. 식음에 있어서만큼은 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그 밥에 그 나물을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토란을 가리켜 그리움의 식물로 그려내고 노오란 송화가루 뽑아내 다식을 만들며 노랗게 물들어가는 그리움의 깊이를 표현하는 그녀의 문체는 참 곱기만 합니다.

 

오늘 점심에는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예전에는 뭘 먹을 때 소스나 양념장을 강하게 썼는데, 요즘은 거의 장을 쓰지 않고 먹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이어트를 하면서 한가지 배운 것이 몸을 조율할 때, 음식을 그 맛 그대로 느끼는 법을 복원하는 것이 다이어트에 굉장히 좋다는 것이었지요. 밥도 천천히 꼬옥 꼬옥 씹어서 단물이 날때까지 입을 조물거려보거나, 갓 따뜻하게 나온 두부를 달큰한 기본장만 뿌려 먹습니다. 그렇게 기본 음식의 원래 맛을 찾아가다 보면 몸이 많이 가벼워지더군요.

 

S#2-슬플 때는 비빔밥을 먹어라

 

그녀가 묘사하는 비빔밥 부분을 읽다보면 글을 쓰는 이 늦은 시간에도, 야참을 핑계대고서라도 시커먼 보리밥에 두 어개 야채를 솔그란히 엊어 비벼먹고 싶습니다. 길지만 인용합니다. "풍성한 비빔밥은 온갖 허무의 헛헛한 슬픔을 넘어서는 존재의 가득함이다. 슬픔을 빗겨가지 않고 정면으로 막아서는 요리가 바로 이 비빔밥의 정서일게다. 모든 혈액과 뇌의 감각이 위장에 집중되어 잠시 동안만이라도 슬픔에서 놓여나고 싶은 일종의 자동제어장치, 그 교묘한 교란상태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에 충실하고 싶다. 슬플때는 비벼먹자. 많이 먹고 배가 터질만큼 고통스러워하며 그 고통에게로 가자. 그 끝에 기다리는 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만날 터이니, 마주 잡을 손 하나 오지 않겠나" 문장이 어찌나 예쁜지요. 이외에도 까고 씻고 썰고 졸이고 삭히며 만들어내는 우리 내 음식의 조리법을 통해 인생사의 단면을 바라보는 글도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저자는 야한 음식이 좋다고 주장합니다.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뜻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섹시하다는 표현보다 야하다는 건 들판을 연상하게 하고 그만큼 정제되지 않아 그 본질의 맛을 보존하고 있는 미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이 자연이 조형한 식물과 동물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그들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곱게 아름답게 먹어야 합니다. 뿌리채 뼈째 먹어야 하는 것이죠. 아름다운 식재료를 마음대로 골라 헤집고 토막내고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마음대로 정하는 논리. 이러한 폭력적 구분짓기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는 엄정합니다.

 

이런 취사선택적 행위가 우리의 아름다운 먹이사슬을 헤집어놓는다고 말합니다. 거칠고 질긴 음식, 거무튀튀하고 울퉁불퉁한 음식, 벌레먹고 꼬부라지고 자잘하고 쇠한 것들 속에 있는 진정한 생명을 찾자고 주장합니다. 이런 음식이 바로 야한 음식입니다. 야한 음식을 먹고 야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우리가 되자고 주장하지요. 어제 제 블로그를 와주셨던 독자분을 따라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멋진 영문 하나를 배웠습니다. Winter will be cold for those who with no warm memories (추억이 없는 자에게 겨울은 혹독하다)란 뜻입니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조청을 졸이실때면 동네 한바퀴를 돌아 코를 흘리며 엄마에게 묻곤 했습니다. "엄마 다 되었나요" "울 막둥이 한 바퀴 더 뛰고 오너라"

 

단것이 귀하던 시절 조청은 참 귀했습니다. 지금이야 메이플 시럽을 비롯하여 언제든 인공조미된 조청을 구할 수 있습니다만 귀했기에 더욱 그리웠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입니다. 어찌보면 음식이란 풍요보단 결핍 속에서 그 본질의 껍질을 더욱 가열차게 벗겨볼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네요. 오랜만에 눈과 입이 행복해지는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오늘 라디오 방송에도 바로 소개하려 합니다. 기회가 되면 저자 윤혜신 선생님이 조리를 하시는 당진의 미당에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식재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이 땅에서 소출되는 것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보니 그저 지나가는 사람 한명이라도 헛헛하게 보낼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네요. 그녀의 책에서 배운 묵구이와 뽀리수잼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41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