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샤넬-미술관에 가다

전화번호부로 만든 드레스-리사이클 미술, 드레스를 만나다

패션 큐레이터 2009. 3. 6. 19:28

 

디자이너 졸리 페이언이 만든 드레스입니다. 재질이 뭔가 하고 살펴봤더니, 놀랍게도 오래된 전화번호부를 일일이 찟어 접어서 드레이프 효과를 냈습니다. 물론 디자인한 작품을 실생활에서 입기란 어렵겠지만 그 시도 하나만큼은 도발적입니다. 그냥 미술작품으로 생각하며 봐야

 

겠지만 그 극미의 섬세함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지네요. 매년 미국에선 디자인 학교를 중심으로 이렇게 사회적 디자인을 위한 컨테스트를 엽니다. 디자인의 사회적 책무랄까. 물론 보는 이들에 따라선 버려진 폐품, 초컬릿 포장지, 전화번호부, 폐지, 깡통캔과 같은 재활용 물품을 이용해 만든 드레스가 뭐 그리 큰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물어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채우고 버릴줄만 알았지, 사용된 것을 새롭게 모아 조합하고 새로운 질서와 배열을 부여하는 철학을 배우지 못하는 세대이기에, 예술계와 디자이너들이 함께 만들어낸 리사이클 아트의 전시는 많은 부분, 우리들의 잠자는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폐기처분이란 용어가 너무나도 쉽게 사용되는 시대, 용도를 다해서 폐기되기도 하고, 스타일상의 문제로 폐기되

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한번의 영화를 누렸던 모든 상품들이 빛의 속도로 폐기되는 사회. 그래야 끊없이 소비를 위한 새로운 파노플리와 상품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시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대입니다.

 

종이를 접고 아교를 칠하고 일일이 주름처리를 해서 만들어낸 이브닝 드레스의 표면을 보면, 종이질감이 마치 의복을 만들때 사용하는 원단처럼, 동일한 물성을 가진 사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자 시작이지요.

 

꼭 전화번호부를 찢지 않더라도, 옷에 대한 물성을 익히고 상대적으로 고가인 원단을 사서 직접 옷을 만드는 훈련을 하기가 어려울 경우 닥종이를 이용해서 학생들은 의복구성을 배웁니다. 닥종이의 물성 자체가 마치 펠트원단처럼 잘 접혀지지 않고, 처리하기가 만만치 않다보니, 이를 통해 작업을 하다보면 흔히 말하는 손맛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최근 한국에서 닥종이(한지)를 이용해 드레스와 수의 등을 만든 상품을 한 스타일 전람회 리뷰를 통해 소개드렸던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한지로 만든 수의는 자연재생도가 높아서 친환경적인 소재로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은 최초로 종이원료 자체에 색을 염색하여 색종이를 만들어 물건을 만들었던 민족입니다. 봉투를 가장 먼저 만든 민족이지요.

 

자꾸 이야기 하다보니 옷 이야기 보다 한국의 한지 자랑만 하게되는 것 같긴 하네요. 더 좋은 건 방충효과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죠. 우리 민족의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목판 인쇄물인 신라 불국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역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같은 세계적인 종이문화재를 보면 그 효과를 알수 있습니다. 한지는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온 우리 고유의 필수품이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살펴보면 방충목과 고급화를 위해 닥종이에 황벽(黃蘗)물을 들인 사실을 알고 계세요? 운향과의 낙엽 활엽 교목인 황벽은 높이는 10~15미터이며, 잎은 마주나고 달걀 모양의 긴 타원의 형태를 띱니다. 6월에 노란색의 단성화()가 원추()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공 모양의 핵과()로 9~10월에 익는데요. 이 노란빛을 종이에 물들이게 되면 방충효과도 좋고 피부에도 좋아서 옷을 만드는 데 제격이랍니다. "reduce, reuse, recycle." 줄이고 다시 쓰고 재생해서 사용하는 소비의 선순환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마케터다 보니 세계적인 마케팅 그룹에서 나온 트랜드 리포트들을 자주 읽습니다. 어떤 것은 상품 카테고리 별로 200만원이 넘는 비싼 리포트도 있죠. 해외 시장을 자주 나가면서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부딪치며 느껴야 하는데그렇지 못할 경우 분석회사들이 만든 수치와 설명을 꼼꼼히 비교해보며 읽고, 어떤 것이 올 한해를 풍미하게 될지를 살펴봅니다.

 

올해 소비자 행동의 전체적인 경향은 매우 보수성을 띠게 될 것이란 게 중평입니다. 그만큼 윤리적인 소비, 아끼고 다시쓰는 소비가 부활할 차례이지요. 며칠전 보았던 영화 <쇼퍼홀릭>도 이런 소비경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만한 테마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리사이클 아트란 단순하게 폐기처분된 물품만을 이용해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엔 언제든지 목적에 따라, 관점에 따라 물질의 형질을 자유자재로 바꿀수 있는 인간의 상상력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들어있지요.

 

올 봄에는 어떻게든 천연염색도 배우고, 한지에 대한 연구도 조금 더 해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디자이너 졸리 페이언이 만든 전화번호부 드레스는 정치적 프로퍼간다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실 입고 다니기는 어렵지요. 물론 그 의도를 아는 이상, 디자이너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놀라운 건 대한민국의 한지는 정말 저렇게 드레스를 만들어도 실제로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죠.

  

 

내일 3월 7일 오후 2시엔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클림트전>을 함께 보러갑니다.

공지사항에서 약속하셨던 15분을 그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내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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