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누군가의 머리를 빗겨주고 싶을 때-요시자와 토모미의 그림

패션 큐레이터 2009. 4. 16. 20:30

 

 

요시자와 토모미 <비밀대화> 캔버스에 유채, 2009년

 

일본 현대미술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요시자와 토모미란 현대 회화작가를 발견했습니다. 화랑 측에 부탁을 해서 작가의 이력과 대표 작품 이미지를 받았습니다. 이름이 있는 작가보다, 항상 신선하고 새롭게 부상할 자격이 있는 신인들에게 관심의 렌즈를 돌리다 보니 도전감도 느낄때가 많지만, 내일의 화가를 만날수 있다는 즐거움에 항상 갓 졸업한 작가군들을 살펴보고 저와 정서와 공감의 빛깔이 비슷한 화가들의 이름을 하나씩 수첩에 적은 후, 그들의 그림을 이미지로 구해 살펴보지요.

 

 

좌) 비상하는 것들을 위하여, 캔버스에 유채, 51*51cm 2006년 우) 토끼, 캔버스에 유채, 116.7*116.7cm 2006년

 

팔랑거리는 소녀의 머리카락의 촉감, 섬세한 꽃 포자 위를 반투명의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영혼의 방을 마실하는 나비의 날개짓, 결곡한 여인네의 피부처럼 모공이 순백하게 메워진 피부, 그녀의 작품 속엔 사실적인 그림의 질감과 더불어 그 현실을 덮고 있는 초현실의 세계가, 따스하게 덮는 어미의 가슴팍 이불처럼 소녀의 마음을 껴안습니다. 

 

추억은 현실 속 도피처가 되고 때로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영혼의 촛불이 되기도 합니다.  <비상하는 것들을 위하여>에선 새장 속에 갖혀 있던 탓에 정신의 우리(cage)를 탈출 하지 못하고,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소녀의 감성이 녹아 있고

 

<토끼>에선 어린시절 분신처럼 엄마의 부재를 대신한 과도기적 대상(Transitional Object)를 껴안은 채, 유아의 세계속에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에 갖힌 우리의 자화상이지요.

 

요시자와 토모미의 그림에 끌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를 둘러싼 풍경은 물질의 풍경과 정신의 풍경으로 나뉩니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외면의 풍경에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방식을 익혀야 하기에, 마음 깊숙히 반드시 숨겨야 하는 푸른 슬픔도 자리합니다.

 

머리카락을 길렀다 잘라본 여자들은 압니다. 그것으로 인해 잃는 것들이 꽤 많다는 걸 말이지요. 그러나 무언가를 잊기 위해 내 표피의 일부를 잘라내고, 그것을 기르는 시간엔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면 돌아와 줄 수 있을까. 머리카락 자르며 보낸 그리운 이의 향기를 기억하는 것이 바로 여자들이죠.

 

그리움에 진저리 치는 소녀들의 머리결엔 이미 한 송이의 꽃이 자라고, 서로에게 엉켜진 머리카락에선 나비의 날개짓이 시작됩니다. 사랑이란 서로의 벽을 헐어가며 그 빈 균열의 틈새로 그의 향기를 메우는 일이라고, 소녀들은 배우고 있는걸까요? 

 

 

요시자와 토모미 <커넥션-연결되어 있음에 관한> 캔버스에 유채, 2009년

 

이번주 라디오 방송에선 <미술관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와 <우리 사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란 두 권의 책을 소개했습니다. 관계 앞에서 항상 힘들어 하는 여자들에게 '홀로있음'와 '외로움'을 구분하라는 간단한 메세지가 그날 따라 왜 그렇게 멘트를 하면서도 와 닿던지요. 저자 플로렌스 포크는 홀로있음과 외로움의 차이를 깨달으려면 미술관에 가라고 충고합니다. 더블과 싱글의 숫자를 세어보면 항상 싱글의 숫자가 압도적이라네요. 여성들이 특히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유년 시절의 기억들과 관련을 맺는답니다.

 

부모의 거절, 어머니의 한탄과 경계심, 이건 어느 나라나 구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요시자와 토모미의 그림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상호구속되어 있습니다. 관계론적 힘을 얻고 내 삶에 도움이 되도록 끌어내기 위해선 이 두 개의 관계, 소외와 고요 속에 나를 바라보는 행위를 구분해야 합니다.

 

 

요시자와 토모미 <비밀 지키기> 캔버스에 유채, 2009년

 

개인적으로  이 그림이 참 좋습니다. 반 투명의 소녀들과 그 머리칼이 서로 엉켜 있지요. 누구의 머리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서로의 머리결을 가다듬으며, 쓸쓸하게 젖은 서로의 눈빛을 이해해 볼 뿐입니다. 소녀들은 머리를 빗기며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입니다. 풋 사랑에 대해, 혹은 신체의 미묘한 변화와 자신의 진화를 이야기 하겠지요. 그녀들은 자라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깊어 더 맑아지는 가을 빛 해묵은 강물처럼, 더욱 깊게 사랑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법을 말입니다.

 

 

또한 하루가 지나면 제 컴퓨터 자판위에 수북히 자연스레 쌓이는 머리카락처럼, 아무 아픔도 없이 버릴 수 있는 이별의 상처를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무수히 건너야 했던 인간의 숲. 그 나지막한 갈래길 위에서의 만남. 상처의 무늬를 스스로 조형하고 있었기에, 그 패턴 속엔 나란 존재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람부는 언덕에 서서 갈잎처럼 서걱거리다, 잠시 내 머리 살 속에 박혀있다 소리없이 돌아서는 한 올의 머리칼. 고른 영혼의 참빗질을 견뎌낸 올들의 힘만이, 지금의 나를 지키고 있음을 배웁니다. 수북히 떨어져버린 내 머리칼을 다른 곳으로 쓸어 버리는 것은, 낯선 이방인의 땅에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의 힘을 빌어 아팠던 내 마음을 보내기 위함일 거라고요.

 

어린시절 입었던 옷들, 켜켜히 버리지 않고 해묵은 서랍장 마지막 칸, 마지막 줄에 열 맞추어 쌓아둔 그 기억들. 갈대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건 바람의 부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그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기억합니다.

 

밤새 빗질한 길이 / 물기 마르고 난 어느 여인의 / 생머리같이 단아하다 / 처음의 낯선 걸음이라 / 발길 옮기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어떻게 이곳까지 걸어왔을까 / 문득 지하까지 내려다 보니 / 맨발이다

 

풀 많은 둥근 지붕이 / 빗길에 닦여져 투명하다 / 세상은 때때로 촘촘한 빗을 들어 / 거센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 몇 번씩이나 가다듬어 주는 것이다 / 마음 한 번 잘못 먹은 /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고 /

 

그 자리에 또 무언가 / 새롭게 일어나는 목숨이 있다 / 젖 물리는 母性 같아서 / 검은 눈빛이 밝다 / 이끼 자주 끼는 /속된 마음도 자주 빗질하라고 / 오늘 내다보는 풍경이 / 어제보다 한층 가깝다 등뒤에 서서 / 무엇에게라도 빗질하고 싶다 / 무지개 빛 나는 / 고운 머릿결 만들어 주려고 / 참빗 하나 샀다  김종제의 <빗질> 전문

 

푸름과 회백색 하늘이 교차하던 하루, 누군가가 굉장히 그리운 모양입니다. 친구가 사준 상아빗 꺼내 거칠어진 머리결을 가다듬었네요. 남정네가 무슨 방정인지요. 머리가 자꾸 빠져, 허브에 머리를 감고 영양 트리트먼트란 것도 해주었습니다. 곱게 머리를 매일 빗으면 혈행이 좋아서 머리가 덜 빠진다네요. 그리움 속에 여러분 한명 한명 그 머리칼 빗겨드리고 싶은 하루입니다. 지칠 정도로 일이 많았네요. 내일도 일이 산더미입니다. 힘을 내야지요.


 

 

 

4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