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추억 속 야광귀신을 만나다-황미자의 조각들

패션 큐레이터 2009. 4. 9. 14:41

 

 

어제 강의를 마치고 인사동으로 오는 길. 영화 <똥파리>의 시사회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중, 우연하게 한 전시를 봤습니다.

요즘들어 부쩍 도예전시에 대한 소개를 많이 했는데요.

 

도시란 공간을 규정하는 시멘트와 콘크리트 더미.

197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도서성(Urbanism)은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의 소재로 사용이 되었죠. 도시는 시골과 대비되는 장소로서

문명과 자연이 양가적으로 대립하고 고밀도와 이질성이 삶의 현장속에 배어나는

장소로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럴수록 삶은 척박하고, 도시란 장소에서

일종의 유민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거, 그나마 기억의 끄나풀을

연결할 수 있는 우리들의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되지요.

 

 

 

 

황미자님의 도예전시회에서 느낀건, 새로움 보단

스쳐 지나온 것들에 대한 기억이고, 우리 모두에게 공감의 지점으로서

영혼의 집을 갖고 있던 과거에 대한 추억입니다.

 

마중물을 넣어야 비로소 그 기능을 발휘했던 수제펌프.

희망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 희망을 마중나갈 물을 넣어야 했던

펌프에 대한 기억. 갓 길어낸 차가운 물을 대야에 받아 얼굴을 씻던 기억.

여름날 집에 돌아오면 펌프물로 등목을 시켜주시던 엄마에 대한

기억.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안온하고 따스했던 기억.

신체의 표피를 흘렀던 차가운 냉감각과 더불어

과거속 한편의 기억의 소품이 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가 실종한 사회.

삶의 구체적인 진실이 이야기를 통해, 입과 귀로 흘러다니던 그때를

상실한 지금, 아이들의 손에는 그저 플레이스테이션과 새롭게 장만한 게임기,

 짜릿한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으로 매워져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말하는 자의

꿈과 그것을 듣는 자의 상상력이 결합한다는 것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꿈이 만나는 자리인거죠.

그 따스한 연금술은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도시의 획일화된 폭력 속에서

우리의 상처를 위무하는 치료제였습니다.

 

 

어린시절 오줌싸개들이 들고 다닌 키를 보니

다행히 이런 기억을 피해다녔던 제 모습이 떠올랐고,

유년의 기억 속에 아이들과 나무 깍아 칼싸움도 벌이고 벌 잡다가

침에 쏘여 손이 퉁퉁 붓기도 했던 그때를 그저 잠시 떠올립니다.

 

 

기도하고 있는 엄마 뒤편에 서서 옷 자락뒤에 숨으면

겁나는 것이 없던 시절. 언제부터인가 이 삭막한 도시 공간 속에는

끊없는 유동성에 노출된 채, 쉼을 위해 피해갈 수 있는 엄마의 품이 사라졌습니다.

 

예전 읽었던 도시 속 삶을 테마로 한 소설들의 표제를 꺼내봅니다

서재 한켠에 놓여진 호영송의 『흐름속의 집』강석경의『지상에 없는 집』

박영한의『지상의 방 한 칸』등 소외와 갖힘, 비정과 냉혹, 잃음과 긴장같은 무거운 단어가

왜 우리의 도시를 규정하는 특징어가 되는지, 이걸 돌파할수 있는 작은 움직임은

과연 존재할수 없을까? 의문을 던져봅니다.

 

 

소중한 예전의 추억제에 빠져 작품들을 보는 데

갑자기 기괴한 형태의 조각품을 발견합니다. 이건 도대체 뭘까요?

여러분 혹시 '야광귀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걸 들어본 경험을 기준으로

세대론적 차이를 설명할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야광귀신은 예전 설날이 되면

신발을 훔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는 귀신으로

알려져 있죠. 이 귀신은 어찌 된 것이 구멍을 보면

꼭 그 숫자를 세보고 싶어 집 앞에 걸어둔 체의 구멍을 세다

새벽 장닭 소리에 허둥지둥 달아나는 야광빛 나는 귀신.

 

비슷한 이미지이긴 하지만 영화 속 골룸과는

많이 다르지요? 복이 있는 신발을 훔쳐간다는 설정도 재미있고

이 귀신을 쫓기위해 체를 걸어둔다는 조상님의 방법도 흥미롭습니다.

 

 

어린시절 비탈길에서 타던 눈오는 날의 썰매며

그저 대야 하나만 있어도 멋진 스키를 대신하던 그때의 삶의 속도감이

그리운 요즘입니다. 자아상실과 익명성이란 두 개의 축 위에, 정체성의 벽돌을

굽는 우리들의 만남이, 너무 힘들고 견고하지 못하기에, 백설기같은

눈 오던 날, 그 위에서 꺄르르 웃으며 함께 하던 친구들이

때로는 보고싶고, 그립기도 합니다.

 

 

아 그러고보고 시멘트 포대도 있었군요.

공동체가 해체되기 전, 따스했던 추억제의 한편에 놓여진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 인간에겐 집과 따스한 온기와 배려, 껴안음과

숙성의 시간이 있었던 그때를, 그저 상정함으로써 현재의 무거운 삶과 두려움을

대비하는 것도, 마냥 옳은 태도는 아닐 겁니다. 도시공간을 우리 내 터우리로

받아들이는 이상, 이 공간을 더욱 값지고 소중하게 디자인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점심을 먹고 협력회사 근처 강변을 따라 걷습니다.

분홍 벚꽃이 추스림의 시간을 버리고 만개하기 위해선, 주변부의 목련이

그 하얀 시트를 깔아, 따스한 속살 받아낼 준비를 하듯, 내 아버지

바다의 은빛 고기때들이 유영하던 과거의 시간 속,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그때의 순수만큼은 지키고 살겠습니다.

 

봄이 완연하다 못해, 더운 기운이 가득하네요.

예전같으면 엄마가 땀흘리고 들어오면, 씻기 싫어하는

제 볼기짝 때리며 등목하라고 상의를 벗기실텐데, 그런 어머니가

요즘 많이 아프셔서 걱정입니다. 나이든 아들은 그저 죄송함만 가득하네요. 영화

<똥파리>를 보면서 가족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는데, 오늘은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고운 빛깔 떡 좀 사야겠습니다.

 

사진 속 황 작가님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만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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