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의 햇살이 꽁꽁 얼었던 길을 녹여주던 2월 어느 날,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오랜만에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남은 시간이 주는 여유를 즐겨볼 생각이었다. 햇살이 좋았던 탓이었을까?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가 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커피숍에서 김홍기 작가가 금세 도착한 듯 막 가방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렇게 30여 분 정도 일찍 시작된 인터뷰는 진하고 향긋한 커피향이 가득한 미술관 앞 커피숍에서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기며 따뜻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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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도 가까이 있고, 카페도 예쁜 데다가 커피향도 너무 좋네요. 여기 자주 오시나요?
네, 단골이에요. 사장님과도 잘 알고요. 바로 앞에 성곡미술관이 있어서 천천히 그림도 둘러 볼 수 있고 여기까지 걸어 들어오는 길도 한적하고 너무 예쁘잖아요. 커피도 너무 맛있어요, 제대로죠. 분위기도 좋죠? 너무 맘에 드는 곳이라 광화문 쪽에서 누굴 만날 일이 있으면 항상 여기서 보자고 제안하곤 하죠.
명함에 미술 칼럼리스트라고 써있는데요. 미술 칼럼리스트라는 명칭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 경우, 그림이 좋아 전시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그림을 좋아하는 초보자는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전공을 했거나 학문적으로 열심히 파고드는 사람도 역시 아니죠. 그저 전시회에 가서 작가에게 궁금한 것을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관심 있는 책도 열심히 읽으며 미술을 공부하는 블로거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편안한 것처럼 저는 정지된 이미지에 몰입할 때 마음이 투명해지는 것을 느끼곤 하거든요. 그렇게 미술에 빠져 지식을 쌓아왔고 여행이나 출장을 갔을 때 해외 박물관에서 본 기억들을 블로그에 기록했죠. 그 과정에서 쌓인 복식사에 기록들을 모아 작년 5월쯤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출간했었어요. 책을 내고 여러 매체와 지금처럼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 때 한 기자분께서 블로그에 미술 관련 글을 쓰고 있고 패션에 관한 책을 냈다고 미술?패션 칼럼리스트라는 명칭을 붙여주셨죠. 과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미술을 주제로 글을 쓰는 제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패션은 빼고, 미술 칼럼리스트라고 명함에 새기고서 그 이름에 어울리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제게도 책의 저자보다는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이라는 블로그 운영자로 더 익숙한데요. 11년이나 블로그를 활발하게 운영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블로그가 익명의 공간이라 글을 쓰는 게 훨씬 자유롭기도 하고, 링크를 이어 새로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날 수 있다는 색다른 즐거움도 있죠. 종종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폐쇄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11년 동안 블로그를 운영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동안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겠죠.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도움을 주기도 했고, 또 제 블로그를 방문하신 분들이 연결돼 도움을 주기도 하시고요. 특강을 하거나 사보에 글을 쓰기도 하는데 제가 하는 그런 일들이 모두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그 돈들은 사회에 환원하는 의미에서 나와 연결되고 지지해준 분들 중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연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블로그를 통해 만난 분들도 많이 기억에 남지만 기억에 남는 인연이라면 비원에서 만난 미국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올라요. 마침 영어로 설명해주는 시간이 지나서 그냥 따라 다니면서 둘러만 보고 계시더라고요. 유창하지는 않지만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갈 일이 있어 영어를 조금 하는 터라 사진도 찍어 드리고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해드렸죠. 함께 비원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분이 인천공항에서 서울 시내 호텔까지 오는 택시비를 10배 가까이 바가지를 쓰셨더라고요. 정말 부끄럽기도 하고 한국 사람으로서 죄송하기도 했죠. 솔직하게 말씀 드리고 대신 사과도 드렸어요. 그리고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퓨전 한국음식점으로 안내해 저녁을 대접했어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던 중에 제가 블로그를 통해 만난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고, 뭔가 보답하고 싶다고 하시길래 정중히 거절하면서 농담처럼 나중에 생각나시면 기부를 해주십사 했었죠. 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두 분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몇 달 후 적지 않은 액수가 후원금으로 입금됐고, 좋은 일에 쓸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종종 일 때문에 뉴욕에 가면 두 분 댁에서 머무르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죠. 우연히 시작됐지만 참 기분 좋은 인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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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미술관’이라는 제목이 기분 좋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네요. 제목에 담긴 의미가 있다면요?
제가 쓴 첫 책의 제목이 ‘샤넬, 미술관에 가다’라고, 복식사에 관한 책이거든요. 이번 책의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면서 문득 든 생각이 그 책의 제목이 조금은 포장이 되었던 건 아닐까 싶더군요. 7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발품을 팔아 쓴 책인 데다가 첫 책이다 보니 우아한 제목을 지으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웃음) 그에 반해 이번 책은 그림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책이니만큼 위로가 되고 웃음을 줄 수 있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죠. 우아하기 보다는 명쾌한 제목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싶었어요.
’하하 미술관’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평소 치유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전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투명해지면서 치유를 받는 듯 한 느낌을 받곤 했어요. 자연스럽게 그림을 통한 치유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러다 보니 미술 치유 에세이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마음 먹고 준비를 해오고 있었는데, 최근에 비슷한 책들이 먼저 나온 건 좀 아쉬운 부분이에요.
‘하하미술관’에 실린 그림들이 모두 한국 작가들의 그림인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 그림들을 선택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에도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죠. 그런데 대부분 클림트나 에곤 쉴레 등 인상주의 작가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인터넷이나 책 등 미디어의 영향이 많은 것 같아요. 책을 쓰기 위해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미술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봤는데, 대부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사실 살아온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쓰는 책에서만큼은 함께 숨쉬고 이야기하면서 답답함을 풀 수 있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컨템포러리 아트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작가들의 그림 중 또 다른 내면의 거울을 가진 작가의 작품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기존에 나와 있는 그림치유 에세이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총 27개의 이야기 중 인터파크도서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추천해주고 싶으신가요?
이번 책에서 제가 작품에 접근한 방법은 스토리텔링이에요. 처음엔 38명의 작가들을 선택해 38꼭지의 글을 썼었어요. 분량 때문에 책엔 27개의 이야기 밖에 실리지 못했지만 38명의 작가들과 인터뷰를 하는 시간이 곧 제 스스로를 치유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작가의 삶을 인터뷰하다 보면 그 안에서 그림과의 접점을 찾게 되고 거기서부터 그림에 담긴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에 담긴 작가의 상처도 마주하게 되고 또 그 그림을 통해 내 상처가 치유가 되기도 하고요. 잘 쓴 글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생은 잘 짜인 한 벌의 스웨터’, ‘삶을 위한 일시 정지’, ‘내 인생의 화양연화’, ‘주부우울증에 걸린 당신에게’는 누구나 하나쯤은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가장 마음에 남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제 마음에 가장 남는 건 17번째 이야기인 ‘나나는 고양이다’입니다. 어릴 적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혼자 남은 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혼자 방에 남아 외로움을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죠. 한복을 지으시던 어머니가 남겨둔 피륙을 만지며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잠이 들던 그 아이가 바로 이경미 작가입니다. 작가는 지금 같이 사는 두 마리의 고양이와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보듬어 주던 천을 한 화폭에 담은 그림을 보여주고 있죠. 상처가 많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고 좋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 더 마음에 남는 것 같아요. 컬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대부분 밝은 느낌을 주는, 재미있는 그림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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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그림 중에서 김홍기 작가를 치유해 준 그림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그림들이 크고 작은 제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해 주었지만 그 중 권경엽 작가의 작품들이 가장 강하게 남네요. 19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림들인데, 그림 속 인물들이 모두 붕대를 감고 있죠. 회사에 다니던 작가가 다쳐서 붕대를 감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스한 배려를 받았고 그 후에 붕대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됐다더군요. 이 그림을 보기 전 날, 비가 엄청나게 많이 오던 날이었는데 7년 동안 준비했던 사업이 2시간의 PT와 3시간의 협상 끝에 제대로 체결되지 않았어요. 너무 힘들었죠. 7년간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느낌이랄까. 그 때 여의도에 있었는데 무작정 걷다가 KBS 앞에서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녹화장에 들어가게 됐어요. 진행자가 눈물에 관한 문장을 읽어줬었는데 다 토할 정도로 울어서 채우라는 문장이 있었어요. 녹화가 끝나고 비를 맞고 걸으며 정말 마음껏 울었습니다. 그 다음 날 이 그림을 봤는데 하얀 붕대 위로 상처의 빛깔이 투영되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붕대가 내 상처를 싸맨 붕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그림을 통해 아픈 마음을 치유 받았다고 생각해요. 공짜로 영혼을 성형 받은 느낌이었죠.
책을 쓰고 나서 작가 본인에게 가장 남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책을 쓰기 위해 그림을 고르고 많은 작가들과 일일이 약속을 해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주변에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인터뷰를 할수록 이미지가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한편의 그림을 통해 치유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의 상황에 공감하고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는 작가들이 많았죠.
그림을 그린 작가들과도 많이 친해지셨겠어요.
그렇죠. 한 두 번의 인터뷰로 끝낸 게 아니라 여러 번 만나 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저도 치유를 받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 쓴 제 글을 읽으며 때론 울컥하는 작가도 있었고, 위로를 받는 작가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성형한다는 건 참 어렵지만 그림과 글을 통해 서로를 치유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책을 쓰는 일이 본업은 아니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래 하시는 일이나 개인적인 계획은 없으세요?
마케터로 12년간 일을 해왔고 지금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건 좋아서 하는 일이죠. 좋아하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라도 회사 일을 더 열심히 해야겠죠? 제가 개인적으로 바느질도 좋아하고 요리도 좋아하거든요. 남자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려나요? (웃음) 사실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복식을 고증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해요.
자기 일을 하면서 그림에 대해 글을 쓸 만큼 공부하려면 노하우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림을 좋아하는 독자들께 살짝 공개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전시회에 자주 가는 게 중요하죠. 카탈로그를 꼭 챙겨서 큐레이터들이 정리해 놓은 글을 여러 번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전시된 그림 중 2~3점만 기억하세요. 집에 돌아와 미술관에서 봤던 그림들을 떠올리며 카탈로그에 써진 설명 옆에 자기 생각을 쓰며 정리해 보는 거죠. 전시회에 가는 횟수가 쌓일수록 다음 전시회 때는 그림에 익숙해질테고 어느덧 그림과 보다 친숙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열심히 보기도 해야겠지만 뻔뻔스럽게 작가나 도슨트들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을 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전 미술관 오프닝 행사 때 가서 밥도 먹고 작가들과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 하죠. 자신의 감상에 작가의 생각, 전문가들의 견해를 더해 그림과 보다 친숙해져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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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미술 칼럼리스트로서 블로그 운영도 더욱 충실하게 할 것이고요. 사보나 잡지 등에 미술 관련 글을 쓰면서 앞으로 책도 더 내고 싶습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 3부작으로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우리나라 복식사에 관한 책들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서양복식사를 베끼다시피 한 책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비전문가인 제가 해외 박물관에서 직접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천 권에 가까운 책을 읽으면서 쓴 ‘샤넬, 미술관에 가다’가 4쇄까지 출간된 것도 재미있게 쓰여진 복식사에 관한 책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옷 주름 하나에도 수 백 가지 의미가 담겨 있거든요. 앞으로 옷을 통해 사회 구조나 동시대의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또 복식은 물론 부채, 하이힐, 장신구, 에로스, 메이크업 등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서 본 내용들을 고증해 책으로 내고도 싶어요.
그리고 제 블로그에 사연을 남겨주신 분들께 ‘하하 미술관’ 책을 보내드리는 하하바이러스 전파운동을 하고 있는데, 텍사스, 아르헨티나 등 외국으로도 보내고 있죠. 더 많은 분들이 제목처럼 ‘하하’ 웃을 수 있도록 100명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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