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샤넬-미술관에 가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서문

패션 큐레이터 2008. 5. 16. 16:31

패션은 단지 옷에 대한 것이 아니다.

패션에는 우리의 생각, 삶의 방식, , 그 모든 것이 깃들어 있다.

코코 샤넬-

 

 

 

집을 나서며 문득 하늘을 보았다. 하늘 위엔 무거운 구름이 걸려있다.

연 이틀째 봄비가 내린다. 어제 저녁 내린 비로 축축해진 오래된 구두를 응달에 잘 말리느라

새 구두를 꺼내 신었다. 구두를 닦을 때마다 내 구두 굽을 본 아저씨들, 하나같이 내 성격이 조급하다고 말했다.

굳이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그 지적이 틀리지 않다. 구두 뒤끝 형태만을 보고도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 내 구두뒷굽이 나를 말해주는 초상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여름, 가을, 겨울……시간의 고리를 지나가는 내 추억의 옷장을 들추어보니,

거기엔 나란 개인의 농밀한 경험과 흔적이 베어 있었다.

 

 

 

머플러 하나를 매어도 당일 날씨의 빛깔이 녹아있고,

모자 하나에도,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놓은 해야 할 일이 드러난다.

겨울이 되면 끼는 벙어리 장갑은 겉으론 활발하지만 말 못할 고민거리로 응어리진 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책이 무엇을 다룬 책인지 묻는다면, 딱 한마디로 복식을 통해 읽는 미술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복식의 역사와 관련 지식들이 미술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존의 미술사에 복식사의 시각을 더해 서로의 옷을 입음으로써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다. 패션은 개인의 명예와 유혹의 욕구를 드러낸다.

감춤과 드러냄을 통해 은밀한 욕망을 표현하기도 하며,

 

 

 

 

허위와 과장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이때 옷은 우리가 몸에 걸치는 사물을 뛰어넘어,

삶으로서의 은유를 구성한다. 옷은 우리가 의지하고 기대어 사는 일종의 은유이다.

삶을 이야기하되 옷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 복식 속에 표현된 작은 디테일이 그림 전체의 의미를

설명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옷에 잡힌 주름 하나, 소매 단 처리, 단추 형태,

비딱하게 쓴 모자의 각도, 직물 프린팅 모두 옷을 입는 우리의 기억을 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복식사가 앤 홀랜더는 시각의 구조(Fabric of Vision)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미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옷의 주름과 직물(fabric)의 짜임새를 살피는 일이 곧 인간의 시각적 구조(fabric)

밝히는 일이라고 까지 말한다. 티치아노와 반 다이크, 들라크루아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옷이 어떻게 모델에게 위엄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제임스 티솟의

그림 속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들의 위선을 패션을 통해 살펴보는 일은 흥미로움을 넘어 소름이 끼칠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패션을 주로 다루었다. 이 당시의 작품 대부분이 이야기가 있는 그림들이고 그만큼 그림 속 다양한 사연들이 구구절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초기 자본주의의 시작과 더불어 소비개념이 부상하던 시기였기에 쇼핑이나 패션이 개인의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말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각 시대별로 화가들은 옷이라는 은유를 통해, 당대의 이상적인 신체미와 시대의 이상을 담아낸다.

옷은 시대를 기록하는 화가의 붓과 같다. 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을 한다. 역사가 반복되듯 패션의 순환은

너무나 당연하다. 옛 것을 새롭게 변형시켜 당대의 정신을 덧붙여가는 과정을 통해 패션은 부침을 지속했다.

패션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직감적으로 옛 그림 속 여인들이 입었던 패션의 아이템이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며 언제든지 당대의 머스트 해브로 부활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하긴 이것이 패션 디자이너들이 복식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미술 속 여인들의 패션을 다루면서 초상화 속 여인들의 포즈와 표정, 옷 매무새를 살피는 일은

200년 전 발행된 패션잡지를 읽는 느낌을 줄 것이다. 나름 패셔니스타라 자부하는 패션의 고수들은 이 책에서

스타일을 면밀히 연구해 보라. 옛 여인의 초상화 속 우아함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찾을 때까지 말이다.

 

부족한 글쓰기로 오랜 세월 읽고 공부한 복식사를 한번에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패션을 소재로 하다 보니 현란한 패션 잡지의 에디터들이 양산하는 글과 비교할 때 세련미가 부족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준 다음 블로그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책 출간을 앞두고 버텼던 몸이 무너져 몇 일을 몸져누워야 했다. 4년 8개월의 긴 시간을 뒤로 한채 이제 세상에 빛을 보러 나간다.......나의 따뜻한 기억 속 소풍은

그렇게 시작되나보나. 부족한 글을 한땀한땀 바느질 하듯 편집하고 만들어준 출판사 식구들에게도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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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미술관에 간 샤넬>이란 폴더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미처 이번 책에 들어가지 못한 패션 이야기들과 편집된 부분들, 흔히

디렉터스 컷이라고 하지요. 오늘 당장 올린 책의 서문 또한 편집 전 내용을 올려봤습니다.

 

 본격적으로 복식을 공부하거나 의상 디자인을 하는 분들에게 이 책에 대한

궁금한 점들, 책의 설명이 부족해서 보완해야 할 부분을

인터넷 확장판 <샤넬-미술관에 가다>을 통해서 덧붙여 가려 합니다.

책을 준비하는 4년여 동안 한국의 출판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패션과 미술이란 두 개의 전문 분야를 접목시키는 만큼, 일반인을 위해 전문

용어들은 최대한 풀어썼습니다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엔

항상 각주를 달아 편하게 볼수 있도록 했어요.

 

언제든 질문 주세요. 책에서 하지 못했던 말들

했지만 편집되었던 말들, 이곳에서 하나하나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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