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사랑, 그 잔인한 행복-영화<행복>을 보다

패션 큐레이터 2007. 10. 24. 00:45

 

지속 가능한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없다.

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저 난폭한 시간 앞에서 막막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다만 구체적인 것은 현존하는 두 사람의 육체일 뿐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결합이라는 연애시의 욕망은 사실은 그 어긋남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전제한다.

그러니 모든 연애시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써 연애의 주체는 사랑이라는 상처 속에서

실존적 동일성을 부여받는 것이 나닐까? 어쩌면 사랑을 방해하는 제도적 현실에 대한
경멸조차도, 그 사랑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알리바이일지도 모른다.

상처의 뼈아픈 깊이를 통해서, 연애에 처한 자는 주체성을 얻는다.
소통의 지속성이 아니라 부재의 지속성이, 사랑의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을 보장한다.

그러니까 그 모든 부재와 상실과 환멸이 역설적으로 사랑을
증거한다.


'연애시를 읽는 몇 가지 이유' 중에서 이광호

 

 

장황하게 한편의 평론을 올렸습니다.

오늘 밤 들어오는 길에 영화 <행복>을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허진호 감독을 좋아합니다. 대학 4학년 처음으로 영화사에 들어가

인턴 경험을 할때 제작에 참여했던 영화가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허진호 감독님을 현장과 사무실에서 자주 뵈었지요.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줄거리를 생각했고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과, 그 사랑의 지속성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흐르더군요. 오늘 본 영화 <행복>은 술과 여자에 찌들려 살던 남자가

간경변 선고를 받고 어느 두메 산골 <희망의 집>이란 요양원으로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거기서 그는 은희란 아가씨를 만납니다.

40퍼센트 정도만 남은 폐로 연명하는 그녀는 한눈에 그에게 반한듯 합니다.

 

 

그 이후는 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멜로 영화의

전형적인 드라마 투르기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비록 몸은 아프지만

생각보단 적극적인 그녀. 고아인데다 8년이 넘게 알아온 폐농양은 이제 그녀의 일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풍경일 뿐, 거기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사랑을 만나 더욱 낙천적이 되어 갑니다.

 

 

은희를 위해 기타를 연주하는 영수(황정님 분)

둘은 그렇게 사랑의 화학작용속에 서로의 가슴 속에 난 소금나무를 수정의 결정체로

오인하며, 돌릴 수 없는 사랑에 빠지지요. 그녀와 함께 살면서 몸이 회복되는 그는

점점 시골에서 궁상맞게 살아가는 이 삶에 염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언제는 변함이 없을 거라던 그 사랑은

한 계절 풍미하다 져버린 그가 꺽어준 꽃들의 일생처럼 짧고 간절하게

스쳐지나갑니다. 그 사랑앞에서 은희는 당황합니다.

 

 

 그녀는 알고 있는듯 합니다.

그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본능적으로 말이죠.

"영수씨 우리 갈이 살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땐 헤어지죠 뭐"

이렇게 당차게 시작했던 사랑은 "개새끼 니가 사람이니"란 말로 마무리 되고 맙니다.

 

 

더 이상의 줄거리를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커다란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 한구석 짠하게, 아니 내 어린시절 친구의 표현대로 "징허디 징헌 사랑땜시' 눈물이 날 뿐입니다

아직도 많이 어린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은희의 모습과 내가 닮았다는 걸

기억해 냈습니다. 목련 꽃비가 내리던 날......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전화를 끊고 여러일을 앓아누웠지만 금새 불면에서 깨어났었죠.

여전히 캠퍼스에 내리던 목련꽃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미 한국을 떠나면서 이별을 준비해온 제겐 그 이별은

선고가 아닌 준비된 상처였을 뿐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랑이 변치 않는 다는 말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어갈수록, 그래도 이런 영화를 볼때마다 혼자서 궁시렁 거리기도 하고

그래도 혹시.....라는 변명을 하며 나 스스로에게 자그마한 마음의 자위를

하고 말지요. 지속가능한 사랑의 방정식은 없다란 명제 앞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고 영향 미치는 이 사랑이란

이름의 마법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행복이었을까요

그 짧은 시간의 사금파리......사랑의 흔적과 기억이 농염하게

우리의 마음에 젖어들던 그때만이 그저 지금 이순간 생의 무의식적인 무늬에 찌들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남은 생의 <행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참 많이 울어본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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