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자유라는 허상의 이름-영화 <영광의 날들>을 보고

패션 큐레이터 2007. 9. 6. 00:19

 

오늘은 오후 일찍 중요한 고객을 만났습니다.

프라자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따스한 커피 한잔, 달콤한 케익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옵니다. 오는 길에 왠지 영화 한편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작은 골목길로 걷고 싶어서 조선일보 미술관 가는 길에 성공회 교회에 핀 가을꽃들도 보고......

 

 

어제 늦게서야 발견한 것이 있는데요.

종로 거리에는 위에 보시는 <가족 시리즈>를 테마로 한 조각들이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숨어있는 풍경 속 1인치를 찾아보세요.

 

 

가을이 시작되는 시간......가족들과 함께 거리를 걸어보세요

이 조각을 보는데 예전 MILK 프로젝트에서 나온 사진집 <가족>에서 대상을 탓던

호주작가의 작품이 떠오릅니다. 가족은 문어의 빨판과 같아서 서로에게 엉켜있는 것이라는.....그 간단한 진실

 

 

그것이 따스한 우리들의 테우리가 되고, 우리의 벽이 되기도 하구요

 

 

물론 시네큐브 앞에도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지요

거리는 거니는 가을의 시간, 흐린 하늘엔 담회색 구름들이

층층히 쌓여, 거리의 우수를 더합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알제리 이민자로 살아온 프랑스 출신의 감독

라시드 부샤렙의 <영광의 날들>입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꺼내온 보도자료와 포스터를 꼼꼼히 읽어보고

읽어볼 영화의 테마가 어떤 것이 될까 예상해봅니다.

 

 

전쟁의 포화, 그 암울한 빛깔들을 표현하는 흑백의 스크린이 화려한 컬러로 바뀝니다.

흑백일때는 몰랐는데 컬러가 되니 군인들 중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들어옵니다. 이 유색군인들은 바로 2차 세계대전 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아프리카 북부 오지에서 가장 힘겹고 어려운 전투를 수행한

아랍 자원군들이었습니다.

 

갈빛 피부의 프랑스 군인들은 자신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아름다운 프랑스 국기를 지키겠다며 <영광의 날들>을 되찾겠다며, 그렇게 전장터에 나갑니다.

 

 

하지만 전쟁의 과정 속에서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고

정작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은 유색인종의 피였지만, 그 피를 으깨고 올라선 것은

백인들의 것이었지요. 그들의 말처럼 총알은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으니까요.

 

아랍의 군인들은 단지 ‘자원군’이라는 초라한 위로로

무덤의 십자가 아래 누여진 채 보상 없이 잊혀져 갔고 망각되어 갑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곤 제국의 힘싸움, 그 지루한 놀이터에서 자신의 영혼과 몸을 바친것이 다 였습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 현지에서 고요한 분노와 반향을 일으켰고,

2006년 9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8만명의 토착민 참전 군인들이 당시 프랑스 군인들과

같은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법안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차기 정권은

이 문제에 대해서 쉬쉬하고 있지요.

 

 

제 2차 세계대전을 교과서는 이렇게 규정합니다.

"파시즘에 대항한 민주주의 세력의 싸움"이라고 말이죠.

과연 그런가? 하고 의문을 던집니다. 가장 혹독하고 힘든 전투에는 유색인종들을

보내고, 그들의 삶과 영혼을 담보해서 얻어낸 저 파시즘에 대한 승리......라 마르세예즈

 

 

보통 전쟁을 테마로 다루는 영화에는 몇가지 코드가 있습니다.

반전의 철학을 말하거나, 혹은 찬양하거나였지요. 결국 전쟁이란 행위에 대해서 물었을 뿐입니다.

그 정당성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오늘 <영광의 날들>은 바로

그 속에서 총알받이로 죽어간 나라잃은 자들, 식민지 백성들의 삶을 그 속에서

고요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지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자유란, 이미 식민상황 속에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해서 탈식민주의 바람이

한국에도 요즘 거세게 불고 있지요. 한국의 민족성향이나, 단일민족 강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구요. 비록 아랍계이지만 군대에서 승급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프리카 출신인 것을 감추기 위해 더욱 아랍군인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하사관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꼭 남의 나라 문제같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식민의 경험이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간 각 개인들의 반응방식또한

이런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지요.

 

 

하지만 역사의 뒤켠에 방치되어 지워진 그 이름들을

복원하고 기억해내는 일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란 인간의 산물, 그 속에서 철저하게 물질이 되어

이동되는 존재인 인간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전쟁영화의 매력이자 힘이지요.

 

 

자유를 외치며 죽어가자고 말하는

그 정치가들의 구호와 수사속에서 과연 '자유'의 고통은 어떤 것인지 물어볼 수 밖에요.

한국또한 베트남 참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5천여명이 사망했고

15000명이 부상했으며, 이후로도 고엽제의 고통속에 살아가는 분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그 <미국>의 전쟁을 위해

우리 또한 저들과 같은 입장에 서야 했고, 잊혀져야 했습니다. 혹자는 이런 말들을 하지요

베트남전이 있었기에 이 나라의 경제가 다시 살아날수 있었다는 식의 말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난 이 땅의 경제력으로, 잊혀져 간 고엽제 피해자들은 어떻게 보상할 수 있나요?

왜 여기에 대해선 국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쓸쓸한 마음이 한구석을 메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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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시는 곡은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입니다.

가을이 되면 더욱 마른 가래침을 뱉고 있을 고엽체 후유증 환자들이 눈에 밟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