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아프간 피랍자들에게-영혼의 목욕을 권한다

패션 큐레이터 2007. 8. 30. 04:07

 


이봉윤_한국의 종교 #1_컬러인화_16×20″_2006

 

아프간에 피랍되었던 23인이 드디어 석방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금과 억류의 순간, 결코 짧지 않았을 그 고통의 시간들을 뒤로 하고

그들이 온다. 너무 기쁘다.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의 죄책감을 주지 않는다는 선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도 여전히 문제점은 남는다. 조선일보가 보여준 피랍사건에 대한

작태는 거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 밖에는 되지 못한다. 왠 영웅만들기에 들어가기로 했나?

국민의 알권리를 강조하기 위해 청와대에 한판 전쟁을 벌이자면서

정작 이 피랍사건을 바라보는 서구의 다른 모든 시선들을 한번에 무시하는

그 의제설정 권리는 과연 누가 부여해주었고, 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이봉윤_한국의 종교 #1_컬러인화_16×20″_2006

이봉윤은 종교적인 공간인 성소를 아주 건조하게 바라본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기에 다소 크로테스크 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을 ‘위한’ 모든 질서와 제약들이 사람보다 먼저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하다.

여기서 정면성은 공간의 의미를 납작하고 편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오히려 부각되는 원근법 때문에

종교의 중심체는 더욱 더 멀게만 느껴지고, 또한 소실점에 의해 명확한 서열이 강조됨으로 해서

대중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대 종교의 모순된 신비주의를 체험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성소만큼 인간이 쪼그라드는 공간은 드물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면 왠지 매직아이를 보는 것 같다.

눈의 초점을 풀어야만 내용이 보이는 그 책 말이다

 

이봉윤의 전시도록에서-책임 큐레이터 이수민의 글을 인용한다.

 

이봉윤의 작품 속에 드러난 교회의 공간과 정치인의 공간이 어쩜 이다지도 동형을 띠고 있을까

이렇게 닮아가는 것이 숙명인가?  23인에 대한 영웅 만들기는 이제 곧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는

전국 간증 투어에 돌입할 태세다. 모순된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정치성의 결합하는 순간이다.

 



허은영_씨앗의 묵상_종이에 혼합재료_90×90cm_2004

 

대구과학대에서 졸업생인 임현주씨에게 대대적인 환영행사와 특별강연을 요청했다지
간호과 강의실 1개를 `임현주 강의실'로 명명,국경을 초월한 임씨의 사랑과 봉사 정신을 후배들에게 전하겠다고 했다는데

그 이유가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정신은 나이팅게일의 삶을 실천한 본보기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라고 했단다.

 

뭐 그럴수 있다고 본다. 학교측이라면. 하지만 이 사안의 관계자였던 정부와 일반 국민들로 그 시선을

확장하게 되면 프레임은 완전 달라진다. 정부는 이번 사안의 조속한 처리를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사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국민 보호'에 대해 항상 미온적이었던

정부에게도 좋은 학습효과가 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정부는 외부비용을 엄청나게 지출해야 했고

국가는 일개 단체를 상대로 협상에 임함으로써, 신인도를 추락시키는 위험을 안아야 했다.

 



김선미_섬유소재-면에 디지털 프린트, 오브제_Iron_가변설치_2005

 

선교가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선교주의가 되면 곤란하다. 지금의 기독교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선교에 대한 입장들이 하나같이 일종의 이즘처럼 되어버렸다. 어떤 교회는 몇명을 파송했느니

우리 교회는 큰 은혜를 입어 더 많은 인원을 보내야 하느니 하는 식의 말들이 교회 내에서 떠돈다.

그게 현실이다. 선교가 일종의 정치적 캠페인이 되고 교회의 세력을 표현하는 일종의 수사학이 되었다는 말이다.

피랍 초기 "정부의 안이한 태도' 운운 하다가 이제 그 고생을 해서 풀려나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말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기독교적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온 국민을 상대로

정부와 더불어 당신들의 석방을 위해 온 힘을 쓰고, 그 과정에서 여론이 밀려버려서

상대적으로 버려지고 배제된 수많은 소말리아의 선원들과 우토로의 백성들에게도 사과의 말을 올리라.

 



심정아_Pray is Beautiful like Trees in Winter's Abbey
설합, 경첩, 양초, 나무가지, 종이, 잉크, 유리,십자가목걸이_51×55×60cm_2006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학력 위조사건에 가장 많은 혐의가 씌워진 곳이

어딘가? 미안하게도 종교계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다. 하나같이 크리스천 세미너리 뭐 이런 학교들이

판을 쳤고, 기독원 같은 단체가 4년제 대학처럼 보여지도록 이력서 위조하고

학위있다고 떠들어댄 곳이 바로 기독교란 말이다. 그러니 욕을 먹어도 할말이 없고

오죽하면 기독교 내에서도 '우체통 학위'란 말을 운운하겠나.

 

작가 심정아의 작품을 좀 보자. <기도는 겨울의 심연에 있는 나무들처럼 아름답다>는

고(故) 대천덕 신부가 세운 기도원 ‘예수원’ 에서 보낸 시간들을 기억하며 만든 작품이다. 

그곳에서 산책하며 보았던 나무들, 허름한 교회, 램프, 십자가 등을 미니에이추어로 갖다놓거나

프린트하거나 그려 넣었다. 순수한 영혼으로 사물을 볼 때 모든 사물은 아름답다.

 

과연 우리시대 기독교가 이렇게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철저한 자기 반성에 근거한 질문을 던져야 할때가 왔다.

 

 



심정아_영혼의 목욕_천, 실, 옷걸이, 욕조, 물_ 93×64×170cm_1998

 

해외언론은 하나같이 이번 사안에 대해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의 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명확하게 전달했다. 물론 타인의 시선에만 매몰되어 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지나쳤던 우리들의 모습. 교세 확장주의와 교회 건축주의에 빠져버린

세속화된 우리 시대의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경종의 목소리임을 기억하자.

선교또한 그 원래의 목적을 잃어서는 안된다. 자성의 목소리를 내어보자.

 

작가 심정아의〈영혼의 목욕>은 침례로 영혼의 죄 사함과 구원을 얻는 성례(聖禮)를 모티브로 한다.

흰 가운이 욕조에 담겨져 있는데 이 욕조에서 물이 올라와 가운을 적시도록 되어 있다.

침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 사함과 의로움, 영생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23인에 대한 영웅만들기에 빠져 있는 조선일보나 거기에 동참하고 있는

아직도 자신들의 과오가 어떤 파장을 몰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저 샘물교회의 신자들은

제발 영혼의 목욕을 하라. 빨리 지성소에서 더러운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가라.

 

 

이경성_떨기나무-처음사랑_혼합재료_100호_2003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켜 공공연한 비난을 한다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던 시절, 지하의 카타콤에서 죽어가며 전했던 그 믿음의 힘들이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지배자가 되고, 지배의 언어가 되고, 지배의 논리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에 족쇄를 채운다.

 

나는 쉐하르란 단어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살진 동물의 기름과 가증스런 흠향으로

자신의 성소를 더럽히는 자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 보아도 지도자란 말은 찾기 어렵다.

오로지 그분의 종만 있을 뿐이다. 둘로스만 있을 뿐이다.

우리 영혼의 낙헌제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제 나오라.

 

세상이 너희를 지도자라고 불러주리라 기대하고 있다면 다시 내려와라.

떨기나무 앞에서 더러운 신발을 벗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라. 처음의 그 사랑을 찾아라.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 그리고 피랍되었던 23인, 조선일보 모두 각자의 책임들을 생각하고

영혼의 때를 밀어라.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한 '남은자' 쉐하르가 되어 세상을 다시 일으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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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을 계속 송고했는데 관리자가 삭제를 하네요.

아무래도 블로거 뉴스에 들어가기에는 주관성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글을 다시 재독하면서 수정을 했지만 여전히 마지막 부분은 주관성이 좀 강한듯 보입니다.

제 글에 대한 비평이지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더욱 주관성이 드러나는 오류가 있는 것 인정합니다

그만큼 더 깊이 알고, 느끼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런 글의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블로거 뉴스의 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지난 10년동안 저는 예술에 대한

칼럼을 써왔던 것이 제 글의 가장 기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이 분야에 대해서는

깊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책도 쓰게 된 셈이죠. 블로거 뉴스라는 것이 에디터들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오픈 에디터란 사람들은 자꾸 사안을 <의제설정>기능을 위해서 그 방향과 테마에 맞는 글만을

찾아서 점수를 부여하는 지금의 조건에선 사실 제 글이 맞질 않는 것 같습니다.

 

칼럼을 쓰던 많은 사람들이 네이버로 이전을 하거나 독립된 홈페이지를 마련한 것도

사실 이런 이유와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블로그 기자니까 기사거리가 될 수 있는 것만

송고를 하고, 오늘처럼 주관성이 강한 글을 쓸때는 송고를 자체에서 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어렵다면 그냥 예전처럼 칼럼니스트로 저 혼자의 공간에서 여러분을 만나도 충분하겠지요.

 

언제부터인가 조회수에 신경을 쓰게 되고, 이건 제 자신의 모습도 아닌거 같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얼마나 행복하게 글을 써왔는데, 저 스스로 방향성을 흐트리면 안될 것 같습니다.

특히 나름대로 취재해서 얻은 좋은 글들은 이 곳에 올리는 것이 어려울 듯 합니다.

사실 출판사에서도 이걸 계속해서 요구해 왔는데, 저는 그저 나눈다는 생각에

무조건적으로 다음이란 공간에 저렴하다 못해 그저 공짜로 나누어 준 것이지요.

물론 광고를 붙이면 됩니다만, 저는 제 공간을 광고로 어지럽힐 생각이 없답니다.

그러니 이런 궁여지책이 나오겠네요.

 

밤을 새어버린 새벽의 시간.....많은 부분이 그냥 아쉽네요.

지난 10년간 다음 초기부터 그 많은 컨텐츠를 제공해온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매도당하고

하나씩 이 곳을 떠나는 것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