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서양화 속, 미녀는 괴로워...

패션 큐레이터 2007. 1. 3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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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최근 한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를 들뜨게 한 무분별한 다이어트 문화는

유럽의 패션쇼에서 '마른모델 퇴출'이란 결정 앞에서

한풀 꺽여들것만 같습니다. 말 그대로 영화속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뚱뚱한 몸과 얼굴 때문에 기회조차 얻지 못하다

성형을 통해 완벽한 에스 라인의 미인으로 재탄생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을 참  푸짐하고 유쾌하게 웃겨줍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신체에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서양 미술사 속 '비만의 역사'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려 합니다.

 

역사가 돈 디벨리의 <역사속 뚱보들을 �아서>란 논문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이 신체란 일종의 거푸집 속에 우리의 살들을 주형시키며 살아왔던 시간들의 역사

속에는 신체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또 다른 역사가 존재합니다.

 

비만을 비롯하여 신체에 대한 묘사와 재현을 통해

시대의 정신을 살펴볼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고대의 조각에서 볼수 있었던

과다한 형태의 유방과 엉덩이를 가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현재의 현대작가 슬로윈스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미술 작품 속에서 <비만>은 일종의 말건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시대의 아련한 자화상을 그려냅니다

 

 

좌 : 페르난도 보테로, '리비에르 아가씨' 1979, 캔버스에 아크릴

우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마드모아젤 리비에르, 1806,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보테로와 앵그르의 그림 속 동일 인물 리비에르
물론 19세기 초 낭만주의로 이행해가던 신고전주의 미술의 거장
앵그르가 그린 당시 14세의 리비에르는 아주 가녀린 소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신고전주의풍의 엠파이어라인 드레스와 황갈색 키드스킨으로 만든 긴 장갑
그리고 샤무아 가죽으로 만든 숄은 당시 귀족여성들의 인기 패션 아이템이었습니다.
 
그녀는 몸이 약해서 이 초상화가 그려진 지 얼마 안되어 패렴으로 사망하게 되지요
이에 반해 초상을 패러디한 보테로의 작품 속 리비에르는 뭐랄까 풍자라기 보다는
새로운 모습의 리비에르를 보여줍니다. 마치 영화 포스터 속 김아중 씨의
비포 앤 애프터를 보는 것 같지요?
 
 
페르난도 보테로가 그린 벨라스케즈의 라스 메니나스 패러디
 
 
서양 미술 속 <비만의 역사>는 신체를 둘러싼 비만의 규정은
결국 문화의 산물임을 확증시켜줍니다.
신체란 항상 권력이 작용하는 가장 주요한 작용점이고
이런 신체를 사회는 자신의 이념을 위해 희생시키고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킴으로서 권력을 영속화 시키곤 했지요
 
사실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라는 시간대에도
이  비만을 둘러싼, 신체의 규정과 문제는 우리의 영혼과 신체를 동시에
일종의 감옥에 가두며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비제 사르트르, 노란 비키니, 1998
 
현대 미국 미술은 이 비만이란 문제를 주요한 회화의 소재로 다루면서
점점 더 비대해가는 미국의 근대성과 그 병리현상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제 사르트르의 작품, 노란 비키니는
현대의 점증되어 가는 자본의 축적과 인간들의 식욕을
비키니란 옷의 은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지요.

 

 
마그나토 파올리, 저울 앞에서 2004
컴퓨터 그래픽
 
파올리의 작품을 보면 그 느낌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만의 역사>를 통해 미국사회를 비판하는 역사가 돈 디벨리는
다소 특이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기 쉽지요. 하지만 디벨리는 이러한 존재론적 성격의
치유법은 현대 미국 사회가 당면한 <게걸스러운 잡식성>의 문화를
전혀 치유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와 자본, 무력기제들을 통해 세계에 대해
항상 지배력을 과시해온 미국은 자신이 씹어먹을수 없는 수준으로 항상
베어먹고 살아가는 동안 점점 더 늘어버린 자신의 신체를
(어찌보면 여기에서 신체란 미국이란 사회 전체에 대한 은유일수 있을 겁니다)
 
더욱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더욱 먹고 소비하라고
찬양하는 이 문화 속에서 더 큰 땅과 더 큰 집을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더이상 제어할수 있는 기제를 스스로 없애버리고 있다는 것이죠.
 
아래 슬로윈스키의 작품은 바로 맥도날드와 캔터키 프라이드, 정부의
지원으로 가속화 되는 복권 문화에 점점더 침윤되며
정신적인 노예가 되어가는 미국 내 흑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슬로윈스키 <비대한 검은 도시> 1995
 
많이 소비하면서도 날씬한 몸을 가지라고 압력을 가하는
매스 미디어의 상징적인 폭력앞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맞는 '보살핌'의 방식을 배워가야 할 때인듯 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요즘 계속해서 바빴습니다. 건강하시죠?
영화 속 김아중씨가 불렀던 <마리아>를 러브홀릭의 목소리롤 들어보세요
멋진한주 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