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당신을 기다리는 이 시간......

패션 큐레이터 2006. 11. 16. 09:24

박항률-기다림, 종이에 아크릴 1999

 

어제 저녁, 빨리 일을 마치고 사간동으로 나갔습니다.

요즘 한국의 콜렉터들 사이에서 조금씩 인기를 끌어가는 알렉스 카츠의 사실주의 풍

그림을 보고, 서도호란 작가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특히 집이란 은유를 통해

그려내는 그의 세계가 궁금해져서 조금씩 자료들을 찾아 읽어보고 있습니다.

화가 서세옥의 아드님이라는데, 그 예술적인 유전자가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문화권력의 후광을 얻고 있는 작업인지를 밝히는 일은 차순에 하려 합니다.

 

모처럼 만에 사간동 길을 걸으니 좋더라구요. 가을 내내, 자신의 내면을 다 태워냈는지

은행잎들은 노랗게 타들어간 자신을 낙하시키고, 그렇게 침잠해가는 시간

거리에 쓸지않은 노란색 물결이 사간동, 행복한 거리를 겨울의 밝은 색환으로 가득 메웁니다

박항률-명상. 1999, 종이에 아크릴

 

사간동에 나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서, 나왔을때, 참 많은 전시를 눈에 담아 갑니다.

젊은 사진작가의 전시회를 하나 보았고, 사진역사의 초기, 드마쉬와 같은 작가들처럼

마치 그림물감으로 그린 풍경같은 사진들, 흔히 검프린트로 작업한 어떤 작가의 사진을 보다가

이제 사진도 대중복제의 시대에서 한장짜리 예술품의 시대로 접어들었나 하는 몽상에 빠집니다.

 

인사동으로 빠지는 길, 박항률의 전시가 있어 기뻤습니다.

이 분이야 뭐 원체 방송을 많이 타서 꽤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고, 물론 저는 이 분의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점 소장하고 싶기도 하구요.

저는 초기에 추상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구체적인 대상을 끌어오면서

내면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런 작업으로 전환하는 과정. 이런 과정에 있는 작업들을

관심있게 보는 편입니다.

 

박항률-명상, 1999, 종이에 아크릴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명상이란 것. 이 절대고요의 시간이

그냥 심심하고 무료한 작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시절에는요. 이 명상이란 걸 통해

나를 생각하고, 내 안에 있는 나와 대화할 시간을 가질수 있다는 걸, 사실

몸의 반응으로 익히고 체련하게 된 것은 기실 서른이란 나이가 훌쩍 넘어서였습니다.

 

박항률-저쪽, 1997 캔버스에 아크릴

 

삶의 무거운 하중들이, 글쓰기를 압박하고

내면에서 빚어내야 할 언어의 항아리들은 화사한 색면의 유약을 바르는 대신

갈래갈래, 이런저런 생각의 사잇길에서, 혼탁한 생의 빗금들을 그어갈때면

그래도 여전히 내겐, 가야한 삶의 방향이 있는 곳임을 다시 한번 되뇌이게 하지요

 

 저어가야할 육체란 대상이

있음을, 내 정신은 부유하는 세상을 행복하게 기착지로 삼고 끊없는 여행을 하는 존재라고

믿어볼때쯤이 되면, 항상 이 명상은 작은 신의 기도가 되어 끝이납니다.

박항률-촛불 앞의 명상, 2006, 캔버스에 아크릴

 

화려한 도시의 전조등이 꺼지고, 내 방을 밝히는 너무 밝은칸델라 빛들의

유희가 끝나갈때면, 내 안에 있는 내게 말을 걸어보려고, 화면 속의 주인공처럼

다소 까실한 명적삼 입고, 조용히 무릎꿇고, 친구가 보내준 작은 국화잎 하나 띄워 차를 끓여내

'차 한잔 하지?' 그렇게 내 안의 친구를 불러봅니다.

 

참 좋은 내 친구, 그 친구가 가라고 부를때, 나는 가지 않았고

멈추라 할때, 나는 정지하지 못했습니다. 기실 어떤쪽이 더 어려운가 하고 묻는다면

후자쪽, 멈추어야 할때, 멈추지 못하고 내 안의 환상을 쫒아 신기루에 반영된 회청빛

자아를 끝까지 몰아세우지요. 나의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내 안에 있는 친구에게 물을때마다

그는 알려주었고, 방향을 정해주었고, 지침을 주었고, 이정표를 통해

생의 네비게이션을 가능하게 해 주었으나, 이 모든것들을 뒤틀고 전유하고, 전복한 것은

내 거만한 자아의 욕망들이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박항률-기다림, 1996 캔버스에 아크릴

 

구루병에 걸려, 유난히 소녀같이 몸이 작았다는 화가의 사촌 여동생

일찍 세상을 뜰수 밖에 없었던 여인에 대한 추억, 화면속에 펼쳐지는 화가의 기억은

이제 다시 현재의 나를 추스리고, 고요한 침묵 속, 사랑했던 순간을 곰삭이게 합니다.

 

너를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다고.....

참 되돌아 보면 별것도 아닌걸, 우선멈춤 표시 보지 못하고, 낙하하고 바스러지는

생의 엲습을 하지 못한채, 달려간 내 생의 무늬들을 다시 한번 조응하는 일입니다.

겨울이 되면, 이렇게 마음 한구석,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게 하는 사람이 그리운 법인가 봅니다

 

박항률-마음의 제단, 1995

 

플라톤이란 친구가, 기억이란, 워라더라, 아남네시스.....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더군요. 항상 기억을 역전시켜

가는 그 과정에서 축적된 온갖 나쁜 힘들을 되돌이켜 보게 하는 것도 결국은

이 명상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항률의 작업중 항상 이렇게 나무틀에 갖혀있는 조각 그림

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이 그리 좋을수가 없어요.

생의 다양한 질감이랄까, 국면이랄까, 뭐라 통일된 목소리로 규정하지 못하는

화가의 내면이, 아크릴이란 소재가 주는 특유의 따스함으로 그 옷을 입기 때문인데요 

박항률-고요, 1999, 캔버스에 아크릴

 

洗足式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계속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오늘 내 이웃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길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사랑의 형식을 가르치지 마라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앞에 서 있다

가르치지 마라 부활절을 위하여
가르치치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정호승의 시를 읽는 늦은 밤, 고요한 침묵으로 걸러낸 작은 생의 언어들 하나하나

여러분께 드릴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게, 그리워할 여러분이 있어 나는

감사합니다. 죽도록 사랑할수 있는 용기와, 이제는 우선멈춤 표시판 앞에서

낙법을 연습할 베짱이 생기게 해주신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봅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새벽 2시 15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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