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ravel/해를 등지고 놀다

베니스에서 죽다....

패션 큐레이터 2006. 10. 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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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아쉬운 일정을 정리하고

새벽시간....부산하게 비행기를 타러 드골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이번 이탈리아 기행에선 개인적으로 얻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두 본거지인 피렌체와 베니스에서 미술사의 한 물결을 이룬

그들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이었고, 베니스에선 서양의 에로티시즘이

시작했다는 그들의 '욕망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기 위해서였죠

 

 

아침의 시간....청색 필터로 걸러낸듯 푸른 기운이 잔열하는

물의 도시 베니스, 한마디로 베니스는 아름다운 물의 정거장 같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의 앙금과 그 잔유물들이 모여 이루어낸 기억의 집들처럼....

베니스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해수면 위로 떠있는 물의 집들, 그 사이사이를 헤쳐가거나

혹은 걷거나, 이렇게 이 도시의 풍광을 담아내는데는 느릿느릿, 느림의 전략을 필요로 합니다.

코발트색과 옅은 적색, 고색창연한 녹빛이 어우러지는 벽들의 향연을 뒤로 하고

그렇게 잔잔한 물결을 헤치며 하나하나 그렇게 담아야 합니다.

느림은....결코 비효율이 아닌 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기 위한

신의 지혜입니다.

 

 

구석구석 많은 골목길에 다소 치일때도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길의 방향과 곡선이 눈에 들어오게 되지요

 

 

베니스 여정의 시작.....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들도 담고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빠의 모습도 담고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작은 소품....

가면의 도시, 베니스 답게 수많은 가면가게들이 도처에 즐비합니다.

가면의 역사와 그 에로틱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면

수십회에 달하는 글을 써야 합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카니발과 가면무도회, 여인들의 복식.....돈 주앙의 고향답게

붉은 장미와 와인, 가면뒤에 숨은 우리들의 고혹적인 에로티시즘은

이 물의 도시 곳곳에 잔혹하리만큼 구석구석 베어있지 않은 곳이 없지요.

 

 

광장에 몰려든 비둘기들과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의 풍경

언제 부터인가 사람들의 풍경이 더 아련하다고

사람이 없는 풍경은 왠지 우울하고 쓸쓸해 보인다고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2월이면 베니스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면페스티벌이 열입니다.

고도의 핸드 메이드 세공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을

되살려내고 혹은 감추어내는 가면들을 만들어 내죠.

사람을 의미하는 Person이 가면을 의미하는 Persona에서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우리내 생의 무대에서 나는 과연 지금까지 몇개의 가면을

써 왔는지 물어보게 되었지요.

 

 

라비린스(labyrinth)....마치 미로처럼 혹은 여인의 여체처럼

고혹적인 곡선과 직선의 형태로 빚어진 이 물의 도시에선

잔잔한 물의 흐름을 따라 서 있는 집들의 형태를 살펴보는 일만으로도 하루를

족히 보내야 합니다.

 

 

여름....성수기엔, 모든 레스토랑에선

다양한 클래식 연주가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아래

이탈리아산 커피 한잔의 여유도 너그럽게 다가옵니다.

 

모르겠습니다.....세월이 갈수록

어떤 것을 보고 기록하고 마음에 담는일이 쉽지 않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예전 대학시절 처음으로 이곳을 갈때는 사진을 찍느라 모든 시간을 보냈는데....

시간이 갈수록 멋진 풍광 앞에 브이자를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 보다는

이제는 여유있게 카페에서 한잔의 차를 마시고 그냥 직선으로 하강하는

 햇살을 느껴보는것. 그런 작은 자유의 항거를 사랑하는 나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비싼 곤돌라도 타보고.....

핑크빛 테이블이 아름다운 가게에서 화려한 식사도 하고

녹빛 바다와 에로틱해보이기 까지 하는 곤돌라와 검정과 빨강색

생을 변주하는 이 두개의 색 앞에서 울컥울컷 쏟아지는 내 마음의 욕망을

살펴보게 됩니다.

 

 

젖은 나무다리를 맨발로 걷고 싶었습니다.

좁은 수로를 걸어가는 동안 이곳도 사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걸

또 간과할번 했습니다. 골목골목에 베어있는 생의 냄새가

남새스럽지만, 왠지모를 여유가 느껴지는 저 빨래거리들처럼

그렇게 강하게 베어있는 이곳을 걸으며.....아직도 내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

 

 

 구름 속의 성당 첨탑에서
괴테의 애인이 알몸으로 종을 치고 있었네.
그 종소리의 수선화 살결이 달빛 리듬으로
나의 커피 잔으로 들어앉았네.
달빛 커피 향이 바람의 붓을 들어
광장 한복판에 오색의 꽃밭을 그려 놓으니
연인들이 그 그림 위로 산책을 하며
비둘기와 함께 솜사탕을 먹었네.
비둘기의 눈동자마다 흰나비가 쏟아져 나와
가로수의 겉옷을 갈아 입히고
옷자락마다 출렁이은 드뷔시의 바다
그 불붙은 파도소리가
막 베아트리체를 찾아가는 갈매기 등에 업혔네.

그 갈매기 등 같은 물결에 떠 있는 곤돌라 서님에
풀물든 눈빛의 한 여인이
금발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어지러운 나의 우울 속으로 들어와
블라우스를 갈아입었네.

 

김영호의  '베네치아에서'

 

여행이 내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미덕은

내가 살아있고, 아직까지 이 미만한 초록빛의 생을

더욱 덧칠할 거리들이 많이 있다는 걸 배우게 한 다는 점입니다.

 

물은 넓고 드높고.....그 속에서 여전히 힘들게 자맥질하는

내 영혼의 분투를 살펴보며, 그래도 한번 하늘을 보며....씽긋 웃어보는 여유

이것이 생의 맛이라고, 언젠가 하나님 곁에서

내가 몸에 입어야할 생의 향기베인 수의라고....그렇게 말해보게 됩니다.

 

 

베니스의 모든 가옥엔

참 많은 창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예전에 미처 자세히 보지 못하고 지나가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베니스의 예쁜 수제화며

장신구, 악세사리....이 모든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를 빚어낼때

 

생은 더욱 가열차지고 아름다움으로 인해

향기를 더해갑니다....그 사랑앞에서 난 참 고맙습니다

 

 

예전....여행속 사진에서는 참 웃는 얼굴을 찾기가 쉽질 않았는데

요즘은 왜 그런지 웃음이 참 많아졌습니다.

아니 헤퍼졌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 미소가 해맑은 웃음이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웃음을 흘리고 사는 것이 좋아집니다.

갓 길어낸 청신한 우물물에 손을 담구고, 열기어린 내 얼굴에 갇다댈때....

손마디 사이로 여리게 빠져가는 그 물방울처럼....그렇게 웃음을 흘리고 살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일단정지' 표시

이제는 제대로 보면서, 쉼과 여유와 반 박자 느려진 내 생의 발자욱을 가지고

그렇게 웃음을 흘리며 살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이 날에 말이죠.....

 

 

이 모든 것을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베니스에서 죽다'란 정찬의 소설을 들고 갔는데 한줄도 못읽었습니다.

아마도 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도

그 남새스럽고 기갈만 가득한 생도 멋지게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